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 비평사, 1994)]는 베스트셀러 시집으로 유명했다.
30대 초반의 여성이 풀어낸 사랑, 고독을 담은 도발적인 시들이 인상적이다.
읽는 내내 '참 시를 잘 쓰는구나', 싶었다.
삼십대에 들어선 여성이 '잔치는 끝났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자유로운 연애, 치열한 사회의식 등 마음껏 살아가던 20대의 시기가 끝이 나고 세상 속으로 편입되는 나이를 30대로 기준 삼았던 걸까?
90년대 초반의 젊은이에게 30대는 요즘의 30대가 생각하는 30대와는 다를 것 같다.
요즘이라면 '마흔, 잔치는 끝났다'라고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시집은 오늘날 40대 초반이 읽으면 괜찮을 것 같다.
내가 이 시집에서 제일 인상적으로 보았던 시는 김용택 시인의 발문에서 인용한 시로 '새들은 아직도......'다.
아스팔트 사이 사이
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휘영청 쏟아질 듯 집을 짓는구나
된바람 매연도 아랑곳 않고
포크레인 드르륵 놀이터 왕왕시끌도
끄떡없을 너희만의 왕국을 가꾸는구나
부우연 서울 나늘 무색타
까맣게 집을 박는구나
봄이면 알 낳고 새끼 치려고
북한산 죽은 가지 베물고
햇새벽 어둠 굼뜨다 휘이휘이
부지런히 푸들거리는구나
무어 더 볼 게 있다고
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
사람 사는 이 세상 떠나지 않고
아직도
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게으른 이불 속 코나 후빌 때
소련 붕괴 뉴스에 아침식탁 웅성거릴 때
소리없이 소문 없이
집 하나 짓고 있었구나
자꾸마 커지는구나
갈수록 둥그래지는구나
봄바람 싸한 냄새만 맡아도
우르르 알을 까겠지
모스크바에서도 소리 없이
둥그렇게 새가 집을 지을까?
김용택 시인은 "거기 이렇게 당당하게 최영미는 '오늘도 집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나는 최영미 시인이 당당하게 집을 짓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시인은 서른을 넘어서면서 이제 자신이 살아갈 인생에 대한 답답한 그림을 새가 집을 짓고 있는 모습을 통해 본다.
세상이 어떠하건 상관치 않으며 자신의 둥지인 집을 마련하고 집을 더 키우고 아이 낳고 조용히 살아갈 자신의 미래를 안타까워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불붙듯 지나온 20대 청춘이 끝이 나고 세속적인 평범한 소시민으로 보이듯 안 보이듯 살아갈 자신의 미래 앞에서 갑갑함을 느끼는 30대 초반의 여성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시 같다.
그런데 현재 60대 초반의 최영미는 30대 초반에 우려했던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20대에 민주화투쟁을 했다면 50대 후반에는 고은의 성폭력을 폭로하면서 미투운동에 불을 붙였다.
여전히 세상에 눈감고 살아가는 소시민이 되지는 않은 것 같다.
민족시인으로 추앙받던 고은의 민낯이 벗겨지니 추악하기 그지 없다.
그의 시집을 돈을 주고 산 내 자신이 한탄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