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초혼제] , 80년 광주의 아픔을 위로하는 장시집

Livcha 2022. 2. 5. 16:38

낡고 바랜 시집, 창작과 비평사에서 1983년에 출간한 고정희 시인의 [초혼제]. 

거의 40년이 된 이 시집을 손에 들었다. 

고정희 시인의 이름은 알았지만 이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은 없었다. 

고정희 시인(1948-1991)이 지리산에서 실족사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한국신학대학을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고 기독교적 세계관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를 염원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인]에 참여하고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일임했던 여성주의자였다. 

여성의, 여성주의자적 시선으로 역사와 사회를 들여다보며 자유의지에 기초한 실존적 고통, 민중에 대한 사랑, 메시아주의, 살아 남은 자의 그리움을 시에 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시인은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15년 동안 모두 10권의 시집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마지막 시집인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을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 

[초혼제]는 5.19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창작하게 된 장시집으로 전통적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통해 민중의 고난과 저항을 형상화하고 고통받는 민중을 위로한다. 하지만 그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민중의 의지와 그런 민중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제 1부 '우리들의 순장'에서는 시적 화자가 자신을 '눈만 뜬 송장'으로 소개하고, 하지만 '산송장이니 죽은 송장과는 다르다'는 밝히며 끝맺는다. 광주 민주화 운동 앞에서 살아남은 자는 눈 뜬 송장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살아 있기에 죽은 자와는 다르다는 것,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암시가 느껴진다. 

제5부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에 이르면 '사람이 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 사람은 누굴까? 메시아? 하지만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럿이며 그것은 다시 고난을 견뎌 이겨내고 역사와 사회 속에서 다시 의지적으로 일어서는 민중이 아닐까 싶다. 

 

"동녁에 붉은 해

새로 뜨는 시간이로구나"로 시집은 끝이 난다. 

시인의 희망, 낙관으로 마무리되는 느낌. 해피엔딩. 

 

시집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롭고 고정희 시인만의 독특한 시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전라남도 해주 출신인 시인의 남도 문화가 결합되어 비극적인 사건의 죽음을 위해 위로하며 바치는 시들이 뒤로 갈수록 더 흥이 나는 구성이라 마음에 든다. 기독교의 비극적 세계관에 갇히지 않고 슬픔도, 죽음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우리 남도의 문화로 나아가는 점이 이 시집의 힘이라고 생각된다. 

 

뒷에 덧붙여진 김정환의 발문은 고정희 시인의 시에 격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결혼을 했네, 안 했네를 거론하면 발문을 시작하고 끝은 맺는 그 구태. 80년대 초반이라서 이런 식의 발문을 썼는지 궁금하다.

고정희의 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니, 이런 어줍잖은 발문은 무시하는 것이 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