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Livcha 2023. 1. 10. 12:12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책표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워낙 유명하니까 이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자 해서 지금껏 읽은 것들을 떠올려 보면, [세계의 끝과 하드 보일드 원더랜드(1985)], [노르웨이의 숲(1987)], [댄스댄스댄스(1988)], [TV피플(1990)], [스푸트니크의 연인(1999)], [해변의 카프카(2002)], [카트 멘쉬크(2004)], [잠(2012)]이 모두다. 그리고 이번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사실 이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된 이유는 동생 때문인데, 동생의 책꽂이에 그의 책이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의 책을 빌려서 읽은 것은 [TV피플]까지다. 그런데 난 그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의 문체가 깔끔하고 세련되었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감동을 받진 못했다. 글이 써늘하다고 해야 하나? 남성작가의 시선에서 그려진 성적 판타지와 잔혹함(?)이 불편하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노르웨이의 숲]이 왜 그렇게 젊은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는지 공감할 수 없었다. 그 책을 20대에 읽지 않아서였을까?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읽기를 중단하게 만든 책이었다.

아무튼 세월이 흘러서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집어들었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내게 울림이 있었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60대에 쓴 소설이다. 다자키 쓰쿠루라는 인물이 와해된 인간관계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로 인한 방황, 허무를 딛고 다시 한 여성과의 친밀한 관계맺기를 시도하면서 상처입은 관계를 되돌아보고 자기를 다시 정체화할 힘을 얻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평생을 통해 이어지는 자기정체화 과정중 30대 중반의 다자키 쓰쿠루의 자기정체화는 이성애에 기반한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10대의 다자키 쓰쿠루는 에로스를 배제한 이상화된 공동체의 관계맺기 속에서 안주하면서 일과 관련한 자기정체화를 준비했다면 20대의 다자키 쓰쿠루는 안전한 둥지였던 공동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와해되고 그로 인해 허무와 고독, 죽음의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헤어쳐나와 상상의 관계와 현실의 관계 속에서 방황한다. 동성인 친구와의 (에로스로 혼동될 정도의) 친밀감에 대한 경험, 그 경험의 단절로 인한 이성과의 현실적 성경험을 통해 쓰쿠루는 자아의 정립을 위한 방황을 이어간다. 작가는 한 인간의 자기 정체화 과정 속에서 사랑의 감정과 고독감, 죽음의 경계에 이를 정도의 허무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을 이야기한다.  에로스(사랑)와 타나토스(죽음)에 대한 욕망은 인간을 정체화하는 주요한 내용임은 분명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번역출간된 것이 적지 않다. 

이번 소설읽기를 계기로 그의 소설을 좀더 읽어보자 싶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읽어볼 생각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너무 길어서 원제도 그렇게 긴 제목을 택했는지 궁금했다. 

원제와 99%일치하는 제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제목은 소설 전체 내용을 요약해서 멋내면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색채가 없다는 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스스로를 가리켜 '텅빈 그릇'이라고 표현하듯, 자아를 단단하게 구축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순례를 떠났다는 것은 소원한 친구 넷을 차례로 만났다는 뜻이다. 제목을 쉽게 번역하면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10대 때 친한 친구들을 다시 만나 자아를 한 단계 더 정체화하다'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전체 19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1-2,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현재 36세로 철도회사의 역설계, 관리부서에서 일한다.

그는 10대부터 철도역에 매료되어 나고야 출신이지만 도쿄 공과대학에 진학한다. 

그런데 그가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을 지나고 난 후 6개월동안  허무와 자살충동에 빠져 지냈다. 

10대 고교시절 친하게 지내며 공동체를 이루었던 네 명의 친구-아카마쓰, 오우미, 시라네, 구로노-로부터 절연당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친구는 각각 지적이고 운동을 잘하고 예술적 재능이 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이 들은 모두 나고야 지역대학에 진학했고 다자키 쓰쿠루는 도교로 대학 진학을 해서 틈만 나면 나고야로 돌아가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지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이 네 명의 친구들로부터 이유도 알지 모른 채 절연당하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었다. 친구들은 쓰쿠루에게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고 쓰쿠루도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쓰쿠루가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쓰쿠루는 여행사에서 일하는 기모토 사라라는 2살 연상의 여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불행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3-4. 쓰쿠루는 5개월간 이어진 허무를 '질투심'을 통해 벗어난다. 

허무를 벗어나서 사귀게 된 친구는 2살 연하의 물리학과를 다니는 동성친구다. 

아버지가 철학교수인 하이다 후미아키는 사색적이다. 그는 자유로운 삶을 원하고 자유롭게 사색하길 원한다.

쓰쿠루의 아버지는 부동산업으로 성공한 사람이고 쓰쿠루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가 3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에게 도쿄의 집을 물려주었다. 

 

여기서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 볼테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내가 이 소설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이 대목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프란츠 리스트의 'Le mal de pays' 즉 '전원풍경이 마음에 불러 일으키는 영문모를 슬픔'을 담은 음악과 

'창의력이란 사려깊은 모방', '사고는 수염'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거론하는 철학자 볼테르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하이다 후미아키가 쓰쿠루에게 알려준 프란츠 리스트의 이 음악은 이 책의 제목이 되었고 그가 상실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으로 나아감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이다란 인물은 쓰쿠루의 인생이 돌파구를 찾는 첫 걸음이 되어주는 것 같다. 

 

기회가 있다면 라자르 베르만(Lazar Berman)의 연주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 또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의 연주도 듣고 싶긴 하다. 내가 평소 즐겨 들었던 '순례의 해'는 리카르도 카스토르의 연주였다. 

 

5. 하이다 아버지의 기묘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이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방랑했을 때 만난 40대 중반의 재즈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 

그에게 죽어가는 사람이 그의 생이 2달 남았음을 알려주었고 하이다 아버지가 그를 만났을 때는 이미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인간에게는 후광처럼 드리워진 모두 저마다의 색깔이 있고 그 색깔이 보인다고 하면서  그 색을 볼 수 있는 능력은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이면 주어진다고 덧붙인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오래 전 프랑스에서 한 꼬마가 사람들 뒤에 후광처럼 있는 색깔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내게 녹색이 보인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는 오렌지 색 후광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사람들의 후광으로 드리워진 색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잊고 있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아디 아버지는 '라운드 미드나이트'라는 곡을 15분 동안 미도리카와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는데, 그때 그가 부적으로 여기는 알 수 없는 주머니를 보았다. 쓰쿠루는 하이다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중에 그 속에 어쩌면 6번째 손가락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상상한다. 6번째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6. 사라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사라는 쓰쿠루에게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좋지만 잠은 자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유는 쓰쿠루의 마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사라는 쓰쿠루의 이상적 공동체 멤버였던 친구 넷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7-8. 쓰쿠르는 자신의 집 소파에서 잠자는 하이다가 자기 방에 나타나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환각을 본다. 

그리고 쓰쿠르의 꿈에 종종 등장하는 시로와 구로. 그는 시로와 구로와 사랑을 나누다가 시로에게 사정하는 꿈을 깨니 하이다에게 사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하이다에게 사정한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 일이 있은 열흘 후 하이다가 사라지고 8개월 후 아무일 없는 것처럼 다시 나타나지만 그는 다시 영영 쓰쿠루 곁을 떠나버린다. 

하이다가 그를 떠난 후 쓰쿠루는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현실의 여성과 섹스를 한다.

 

9. 사라를 다시 만났을 때 사라는 자신이 알아 낸 친구 넷에 대한 현재 정보를 알려준다. 

구로는 핀란드인과 결혼해서 핀란드에서 살고, 오우미는 나고야에서 살면서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일한다.

아카마쓰 역시 나고야에 살면서 자기계발 세미나로 유명인이 되었다. 

그런데 시로는 6년 전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10. 쓰쿠루는 대학2년 여름방학 때 그와 절연한 이유를 오우미를 만나 묻는다.

오우미를 통해서 시로가 자신에게서 강간당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오우미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또 시로는 목이 졸려 죽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된다.

 

11. 아카를 찾아가 만난 쓰쿠루는 아카 역시 자신이 시로를 강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시로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대해 고백한다.

 

12. 다시 사라를 만나 아카와 오우미를 만난 것에 대해 알려준다. 

사라는 쓰쿠루에게 5인의 이상적 공동체는 남녀관계를 개입시키지 않는 부자연스러움이 있음을 말한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친구로 부터 '색이 바래진(또는 흐려진) 느낌을 받았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친구에 대해 했던 실망감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친하게 지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만남을 이어갔던 친구와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가 다시 만났던 적이 있는데, 그 친구의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재회를 후회했었다. 색이 바래진 느낌을 넘어 색이 달라진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때 이후 난 과거에 친했던 친구지만 한동안 만남이 이어지지 않은 친구를 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사라가 쓰쿠루에게  '지금 친구 있어?'라고 물었을 때 쓰쿠루는 '지금 친구라 할 만한 상대는 없어'라고 대답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쓰쿠루의 대답이 나의 대답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았던 친구들은 모두 어딜 갔을까? 

 

13-15 구로를 만나기 위해 핀란드행을 결정하고 구로와 그의 딸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갔다가 쓰쿠루는 사라가 50대 초반의 남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다. 이 목격은 쓰쿠루에게 질투심보다는 슬픔을 안겨줬다는 구절이 나온다. 계속해서 친밀한 관계가 와해되는 것에서 오는 상처가 반복되면서 분노, 질투심보다는 무력감,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헬싱키에 도착해서 도움을 받아 구로의 여름별장을 찾아간다. 

구로는 핀란드에서 에리가 되었고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일단 쓰쿠루는 남편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산책간 에리를 기다렸다. 

 

"사람의 마음은 밤의 새다.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일직선으로 그쪽을 향해서 날아간다."(14)

 

16. 에리와 대화를 나누면서 16년 전의 진실을 듣는다.

시로(유즈)는 정말로 강간을 당했고 임신을 했다. 그리고 유산을 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유즈를 포함해서 모두 세 명. 

유즈는 쓰쿠루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믿었다.

유즈는 성적 욕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섹스에 대한 혐오와 공포심을 가지고 있어 거식증을 앓았다. 그래서 에리가 유즈를 돌보기로 결심하면서 자신이 쓰쿠루를 좋아했지만 유즈를 지키기 위해 쓰쿠루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고백한다. 

 

사람의 마음은 상처와 상처로 연결된다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17. 

에리는 나중에는 지쳐서 유즈를 포기하고 핀란드인과 결혼해서 핀란드로 도망쳤다고 고백한다. 

쓰쿠루는 에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라와의 관계를 고백한다. 

에리는 쓰쿠루에게 사라를 꼭 잡으라고 충고한다. 

 

18. 

쓰쿠루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사라에게 진심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사라는 사흘 정도 시간을 달라고 쓰쿠루에게 요구한다. 

 

19. 

마지막 부분에서 쓰쿠루는 신주쿠 역에 있다. 

그가 사라와 만나 관계를 제대로 이어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쓰쿠루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직시했고 그 시간을 너머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

 

"다자키 쓰쿠루에게는 가야할 장소가 없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테제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가야 할 장소도 없고 지금도 없다. 그에게 유일한 장소는 '지금 이 순간'이다."

 

지독히 고독했던 시간 속에서 내게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지금은 더는 그때처럼 고독하지는 않다. 

다자키 쓰쿠루도 이전처럼 고독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