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피어가 올해 1월에 번역출간한 미야베 미유키의 책은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제목이 무척 길구나 싶었다. 제목을 보다 보니 좀비물인가?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도서관에 이 책을 구입해달라고 신청했고 그 책을 받아서 읽는 순간, 잠깐 의아했다.
12편의 단편소설이었는데다가 각각의 소설 제목이 모두 그렇게 길었다.
그리고 첫번째 소설 '산산이 지는 것은 여물고자 함이니 복사꽃'을 읽고 나니 시대물도 아니고 현대 이야기인데다가 미쓰터리물도 아니고 판타지물도 아닌 평범한 드라마적인 이야기라서... 약간 실망했다고 할까.
일곱 편을 읽고 난 다음에야 모든 소설의 장르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것도.
작가가 여성이라서 그런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통받는 여성들을 잘 표현했다.
그런데 7편을 읽는 동안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글 말미의 사람 이름을 7번째 소설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앞의 소설들을 뒤적여보니까 모두 말미에 사람 이름이 있었다.
도대체 뭘까?
난 나머지 소설을 읽기에 앞서 작가의 말과 편집자의 말부터 읽어 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까, 이 책은 미야베 미유키의 새로운 시도로 쓰여진 것이었다.
작가가 14년 전부터 참여하는 또래 15명으로 구성된 소모임 BBK(처음에는 '노망 방지 가라오케', 나중에는 '노망 방지 하이쿠 모임'의 약자)에서 생산된 하이쿠를 모티브로 해서 단편 소설을 쓴 것이었다.
모티브가 된 하이쿠가 각 단편 소설의 제목이 되고 각 소설의 말미의 이름은 그 하이쿠를 쓴 사람의 이름이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일단 12편의 하이쿠를 이용해서 소설을 썼는데, 앞으로 모임의 하이쿠를 모티브로 한 소설을 더 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작가의 말과 편집자의 말을 모두 읽고 나니 각 단편소설의 장황하면서도 지독히 문학적인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글 번역본은 실린 12편의 단편 가운데 한 편인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를 제목으로 뽑았고 원래 이 책의 제목은 '봉봉사이쿠'였다. 봉봉은 '평범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탕'을 뜻하기도 한다고. 다시 말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하이쿠임을 암시하면서도 그 사람들의 하이쿠가 사탕처럼 섬세하고 어여쁘다는 의미도 포함한다고 작가는 밝혔다. 사이쿠는 하이쿠를 채록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편집자의 말에 의하면 각각의 하이쿠는 사계절 중 하나를 담고 있다고 한다. 어떤 계절이 배경인지 이해하는 것도 나름 즐거움이 되겠다.
나는 7편을 읽고 잠시 멈추었던 독서를 다시 이어갔다.
'산산이 지는 것은 여물고자 함이니 복사꽃'-바람둥이 백수 남편을 위해 온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면서 뒷바라지하는 어리석은 여성 이야기. (복사꽃이 복숭아꽃이니 한창인 봄이 계절적 배경. 장르는 드라마)
'외국서 찾아온 사위가 장인의 묘석을 닦네'-'만년세포'의 발견 이후 그 세포를 이용해서 훼손된 세포를 치료하는 의료기술의 발달, 신기술을 찬성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의 싸움이 소재. 남편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지만 신기술을 반대하는 남편의 뜻과 자녀들의 처지를 고려해서 남편의 죽음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여성 이야기 (오봉(8월15일)이 시간적 배경이니 계절은 한여름. 장르는 SF 판타지)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의심과 집착의 광기를 보이는 남편을 둔 여성 이야기(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는 즈음이나 초가을이 배경. 장르는 드라마)
'장미 꽃잎 지는 새벽 두 시 누군가 떠나가네' 폭력적이고 돈 뺏기에만 관심 있는 나쁜 남자와 연애하게 된 여대생 이야기(장미꽃이 지는 시기이니 초여름이 배경. 장르는 호러)
'창 밖 베란다에 키우는 여주 커튼 열매는 두 개'-임신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 이야기(여주를 심는 5월부터 한 해를 보낸 후 새해의 2월까지. 사계절 이야기. 장르는 판타지)
'메마른 해바라기 불러보니 돌아보는 꽃 있네'-이중 연애를 한 약혼자로 인해 직장도 잃고 결혼도 취소가 된 여성 이야기 (9월 첫째주이니까 여름이 끝나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 장르는 판타지.)
'낯선 가위여 꽃밭의 맨드라미 목을 자르리'-교통사고로 10대 중반에 사망한 여학생을 잊지 못하는 남자와 그 남자의 가족 때문에 이혼을 결심하는 여성 이야기(여름휴가가 시작된 시기, 오래 전에 죽은 사람에게 집착하는 가족 이야기는 엽기적이라고 할까.)-다양한 사람의 시선에서 쓰인 글들이 함께 하는 것이 재미나다.
'프레젠트 코트 머플러 무톤 부츠'-10세 소년이 우연히 만난 여성 이야기가 포함됨. 결혼약속을 하고 동거남에게 일방적으로 이별통보를 받았지만 그동안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여성의 이야기 (크리스마스 전이니까 겨울이 배경. 장르는 드라마.)
'어스름한 저녁 이끼낀 묘석에 새끼 도마뱀'-새 집에 이사왔다가 우연히 행방불명된 소년의 사체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 소년. 사체로 발견된 아들로 인해 고통받는 어머니가 이야기가 더해짐.(여름방학때니까 여름이 배경. 장르는 드라마)
'푸르른 겨울날 먼 길 나섰다 만난 장례행렬'- 사랑의 이름으로 스토킹하다 자살한 오빠의 장례식 때 여동생은 우연히 잠깐 10대소녀를 만나 서로 속내를 이야기한다. 이 소녀는 엄마와 소녀를 버린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엄마 몰래 작별 인사를 하러 가던 중. 등장 인물은 아니지만 오빠에게 스토킹 당한 여성과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의 이야기가 포함됨.(1월 중순이니 겨울이 배경. 장르는 드라마)
'올해도 같은 밥 같은 찬을 먹는 따뜻한 봄날'-어느 가족이 봄날 같은 장소를 방문하고 같은 음식을 먹는 행위를 수 년간 하는 동안의 가족 상황의 변화, 주위 풍경의 변화를 그림. 이 단편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개인적으로 같은 장소를 같은 시기에 방문하는 걸 좋아해서. 변화는 놀라움과 낯섬을 안겨주지만 한 편으로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다. (봄이 배경. 장르는 드라마)
'산을 내려가는 여행 역마다 꽃이 피어나네'-가족 내에서 왕따를 당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여성 이야기. 인생 살이는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다는 메시지. (매화가 피기 시작하는 봄이 배경. 장르는 드라마)
이번 단편집은 평소 좋아하는 미야베 미유키 시대 소설이나 미스터리가 아니어서 좀 아쉽지만 변함없는, 아니 더 유려해지는 작가의 글솜씨와 인간의, 특히 여성의 고통과 심리를 잘 묘사했다는 감탄을 하며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