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다 손에 든 청소년 판타지 소설 [멸망지구학클럽].
'D-110, 죽기 전에 할 일 찾기'라는 부제 때문에 빌려왔다. 마치 버킷 리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부제다.
어쨌거나 죽음을 직면한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재미나게 그려졌다.
이 책은 일본에서 2021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토토북에서 2023년 가을에 번역출간했다.
이 책을 쓴 작가는 무카이 소고.
아직 이 사람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의 주인공은 네 명의 청소년이다. 고마쓰 다마카, 덴도 아오, 쓰쓰미 세쓰나, 안자이 마사요시.
이들은 멸망 지구학 클럽 동호회 회원이다.
지구와 델타가 부딪혀서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110일이 남았기에 그때까지 뭔가를 찾아서 하려고 하는 멸망 지구학 클럽 회원들.
무엇보다도 다마카는 멋지게 죽는 방법을 궁리한다. 하지만 아오는 무얼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멸망' 직전에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서 실행한다. '멸망'해 가는 현실을 원망하거나 슬퍼하는 대신 그 현실을 최대한 이용한다. 아오가 속한 '멸망 지구학 클럽'은 바로 그런 방침으로 활동하고 있다.('화성의 저녁노을은 붉지 않다' 중)
멋지게 죽는 방법. 인생의 마지막에 할 일. 다마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아오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화성의 저녁노을은 붉지 않다' 중)
물리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오늘로부터 110일 후 델타 좌표와 지구 좌표가 정확히 겹치게 된다. 델타의 지름은 지구의 약 4분의 3. 수 없이 계산을 거듭해 봤지만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화성의 저녁노을은 붉지 않다' 중)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는 죽을 병에 걸려서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기에 남은 날들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죽음을 직면한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죽음에 직면한 삶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아오와 다마카와 세쓰나는 살아 있다. 사랑스러운 것들을 죽이면서까지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발돋움한다' 중)
그동안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오늘은 궤도가 바뀌었을지도 몰라.'라고 기대하면서 관측할 때마다 현실에서 도피했다. ('그래서 그는 발돋움한다' 중)
'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고작이었는데.'
앞일은 가능한 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그것이 아오에게는 일종의 자기방어이자 현실도피였다. 그래선 안 된다고 다마카는 말한다. 지구의 종말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최후의 할 일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발돋움한다' 중)
눈 앞에 지구의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 강한 삶은 아오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 그들의 미래는 분명히 있었다. 단 100일 남짓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발돋움한다' 중)
톨스토이의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를 걸어라." ('그래서 그는 발돋움한다' 중)
나는 내가 살 날이 얼마 없다고 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다마카는 청소년이라서 살 날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더 아쉬울테고 따라서 남은 날들을 충실히 보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쩌면 다마카의 마음과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고 있는 지금도 델타는 1초마다 지구에 바싹바싹 다가오고 있다.1초를 산다는 것은 1초만큼 생명의 끝을 향해 다가간다는 것. 두려운 죽음의 낭떠러지로 쉴 새 없이 달려간다는 것이다.('암시장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위 문장은 우리가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아오에게도 특별한 이벤트였다. 미래에 조금씩 눈을 돌리고 이런 '작은 즐거움'부터 맛보아 나가려는 자신과 미래에 가로놓인 확실한 죽음 회피하려는 또 하나의 자신이 가슴 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암시장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멸망 지구학 클럽의 청소년들은 델타를 관찰하고 토끼를 키우고 반딧불이를 보고 움막을 이용해 거대한 사진을 찍고 2년 전 세계폭동 이후의 세계사 지역사를 정리한다.
아오는 흘긋 다마카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다마카는 어지러이 날고 있는 반딧불이에 정신이 팔려, 어린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반딧불이의 춤을 바라보았다.
아오는 아주 잠깐 동안,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세상을 향한 온갖 감정을 잊고 마음의 평온을 느꼈다. 그것은 모든 위기감이며 불안감을 초월한 행복감이었다.('멸망 로맨티시즘' 중)
'나는......고마쓰 다마카의 자유를 지켜줄 수 있는, 보고 싶은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덴도 아오가 되고 싶다.'('한정판 우주여행 티켓' 중)
저자는 아이들이 얼마 남지 않은 나날조차 미래에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자유로이 추구하는 모습을 그린다.
4명의 청소년들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구 멸망의 날을 맞게 될 것이다.
세쓰나는 아름다운 날들의 기억을 위해 우주로, 마사요시는 여동생과 함께 하기 위해, 아오와 다마카는 살던 곳에서 마음껏 자유로이 지내기로 한다.
나는 소설의 끝에서 두 번째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렇다. 죽기 전까지 또 하루가 시작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죽음을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