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카제즈(Jean Kazez)의 [동물에 대한 예의(Animalkind: What we owe to animals)], 제목이 멋있어 읽기 시작한 책.
그런데 원제를 보면 저자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1. 우선 'Animalkind'라는 단어가 나온다.
저자는 'kind'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친절을 뜻하는 kindness, 종류를 뜻하는 kind, 친족을 뜻하는 kin는 모두 고대 영어인 cynd에서 나왔다.
"만약 우리가 어원을 지침으로 삼는다면, 친절이란 곧 누군가를 친족으로, 즉 '나와 같은 종류'로 대한다는 것인 데다,
우리는 사고가 깨이고 확장될수록 오직 가족 구성원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다 넓은 범주의 나와 같은 종류, 즉 나와 같은 민족, 국가, 종까지도 중요시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욱더 사고가 깨이고 확장되면, 다른 종의 구성원들까지도 나와 같은 종류로 받아들이게 된다."(2장)
이런 생각은 18세기 서양철학자들인 칸트와 벤담의 사상에서 나온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동물에 대한 연민이 있었던 철학자였는데, 동물에게 친절한 인간은 인간에게도 친절할 것이고, 동물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잔인하게 대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이 대목을 읽으면서 바로 연쇄살인마 강호순이 떠올랐다. 개들에게 잔인한 그는 사람에게도 잔인했다.
동물을 대하는 방식과 사람의 대하는 방식에는 연관성이 있다고 본 것.
그리고 제레미 벤담은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최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철학자다.
동물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그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마침내 진화론자 찰스 다윈에 오면 데카르트가 우연의 산물로 생각했던 종다양성을 자연선택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생명의 나무'라는 은유를 사용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공통조상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동물들 상호간의 근본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19세기에야 비로소 종의 다양성과 종들간의 유사성, 연속성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아무튼 저자는 동물에게 친절히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치있는 생각은 동물까지 확장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2. 그리고 부제는 '동물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과 우리 인간을 구분하는 제목.
저자는 동물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동물은 인간과 구별된다는 생각을 유지하려고 함을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다.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식의 생각은 아주 오랜 세월 고착화되어 있는 것.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 동물, 인간의 서열을 정리하고,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그 근거를 이성에 두었다.
플라톤, 신플라톤주의, 중세 기독교 철학자는 '충만의 원리'에 기초해서 세상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체가 필요하다 생각.
충만의 원리에 의하면 가장 덜 완벽한 것에서부터 가장 완벽한 것으로의 존재의 사다리를 가정하는데,
인간은 사다리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고 동물은 인간보다 아래, 인간보다 위에서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있다고 상상했다.
인간이 유일한 이성적 존재는 아니지만 하위 존재자보다는 더 관심을 받을 존재이고 하위 존재자들은 덜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 근대철학자인 합리주의자 르네 데카르트는 동물은 영혼(마음) 없는 기계로 보면서 동물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생각을 가졌다.
동물은 이성도 없고 마음도 없어 고통도 못 느낀다고 보았다.
하지만 저자는 일부 종은 자아인식, 타자인식의 의식도 있고, 동정심, 감정이입, 분노 등의 감정도 있음을,
그리고 인간도 이성적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고 본능에 좌우되기도 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생명가치의 중요성이 다르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인간이 장애가 없는 동물보다 더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드러난다. 바로 종차별주의자인 것.
이 대목은 철학적 사색이라기 보다는 다수 인간의 생각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동물과 인간이 어려움에 처해졌을 때 인간을 구하고 동물을 포기하는 것에 크게 마음 불편하지 않는 것처럼.
3. 저자는 현대 철학자 피터싱어가 사용하는 '종차별주의'라는 용어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다. 당연하다.
원시시대의 수렵생활을 할 때 인간이 동물을 사냥해서 먹었던 것처럼, 현대에 오면 인류를 질병에서 구해내기 위해 동물실험은 허용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쓸데 없는 동물실험은 안 되지만, 꼭 필요한 실험은 해야 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원숭이에게 고통을 주는 실험은 용인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런 주장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철학적 추론으로 볼 때는 엄밀하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원시시대 생존을 위한 먹거리를 구입하는 사냥과 현대의 백신개발을 위한 실험이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결국 저자도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동물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먼저 인간의 이익을 생각하고 동물의 이익은 그 다음에 둔다는 주장. 그것이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저자는 동물에게 고통을 가해도 되는 것과 가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공장식 축산을 통해 동물 학대를 하는 것은 용인해서는 안 되기에 저자는 채식을 선택한다.
저자가 동물에게 보다 친절해 지기 위해 선택한 일상적 노력에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철학적 사색이라고 하기에 그의 사색은 부족하다.
인류의 이익을 위한 동물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 이상은 아니니까.
철학적 사색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간을 위해서라면 동물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평범한 인간중심주의적, 인간을 위한 이기적 생각을 정당화하려 하다 보니 억지논리가 된다.
동물의 인간이익을 위한 희생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최소한의 동물희생 이외에는 모두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
결국 이 시대에 동물희생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렵다.
인간의 증식, 수명연장, 미식, 재미 등, 우리 인간의 이기심을 위해 동물을 희생시킴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인간의 나약함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일상 속에서 동물에 대한 태도나 생각의 정도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저자는 소아마비 백신을 위한 동물 희생까지는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우울증에 대한 원숭이 실험같은 동물실험은 거부해야 한다고 정도의 차이를 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원시시대 생존을 위한 동물사냥은 인정하되, 현대의 동물실험은 모두 부정할 수도 있다.
저자는 공장식 축산에 반대해서 채식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공장식 축산의 소, 돼지 등은 반대하고, 양식하는 물고기는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각자 허용되야 하는 정도에서 차이가 나는 것.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동물에게 친절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 들여다 보고 공존하는 다른 생명체에게 좀더 친절한 태도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부족하나마 조금씩 좀더 나은 가치를 향해 노력할 뿐.
저자 정도로 노력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