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는 책 제목에 낚여서 읽기 시작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고 그의 책도 읽은 적은 없다.
아타톨 프랑스(Anatole France, 1844-1924)는 필명이며 작가의 본명은 Jacque-Anatole-François Thibault였다.
작가 이력에 소개된 바와 같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1921년 [펭귄의 섬, L'île des peiunguins]이라는 소설로 받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주의자가 되었고, 드레퓌스 사건때 에밀 졸라와 함께 드레퓌스 무죄를 주장하면서 반유태주의에 맞섰다.
당시 카톨릭측에서는 반유태주의를 표방하면서 에밀 졸라와 아나톨 프랑스의 저서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고 한다.
지금도 프랑스 카톨릭 신봉자들은 우파를 표방할 뿐만 아니라 극우주의자는 카톨릭신자로 알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Le jardin d'Epicure)]은 1894년에 출간된 책이다.
짧은 에세이들을 묶어서 만든 책인데, 그의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잘 담겨 있다. 그의 생각이 가진 개인적이고 시대적 한계가 분명해 보이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그의 거침없는 글솜씨는 매력적이다.
책의 거의 절반은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차지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
-생명체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유기 생명체가 우리가 사는 지구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출현했거나 불행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면 말이다.
(확신할 수 없는 사실을 확신하는 작가적 생각)
-인간의 사랑을 죄로 규정함으로써 기독교는 이를 도와준 셈이다. 기독교는 성직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여성을 두려워하며 여성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강조한다.
-아름다움으로 잘 알려진 아스파시아, 라이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를 악마 같은 존재이자 남자를 지옥으로 인도할 여인으로 낙인찍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영예인가! 여자 성인도 그 사실에 무심할 수 없으리라. 남성을 설레게 하고픈 의도가 없는 가장 수수하고 엄격한 여성이라도,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어떤 남성이든 설레게 할 수 있다.
(카톨릭의 여성에 대한 믿음이나 작가의 여성에 대한 생각은 모두 지극히 남성위주의 편파성이 보인다.)
-그대들이 지금처럼 가공할 만한 매력을 지닌 존재가 되기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온갖 희생과 범죄의 원인이 되기까지, 문명이 그대들에게 베일을 씌우고 종교가 죄책감을 안겨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자 비로소 완벽해졌고. 다시 말해 여성들은 비밀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죄악이 되었소.
(여성이 남성에 의해 숭배의 대상이나 혐오의 죄악이 되어온 것에 카톨릭의 역할이 있었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만약 그대들 같은 여성이라면, 나는 분명 그대들을 남성과 동등하게 만들려는 '해방자'들을 경계할 것이오. 그대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할 자들이니 말이오. 남자 변호사나 약사와 동등해진다고 해서 그대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조심하시오. 그대들은 이미 가지고 있던 신비함과 매력의 보따리를 몇 개 풀어 놓았으니, 하지만 모두 끝난 것은 아니오. 우리 남성들은 여전히 그대들을 위해 싸우고 파산을 자처하고 목숨을 내놓으니까. 그런데 요즘 전차를 타고 가다 보면 그대들에게 자리조차 양보하지 않는 젊은 청년들을 보게 되오. 오래된 종교와 함께 여성을 숭배하는 습관도 사라지고 있고.
(작가는 여성이 숭배받는 것이 남성과 평등해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는 지극히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카톨릭만큼이나 카톨릭을 비판하는 작가 역시 '여성'에 대한 낡은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는 쾌락은 없다. 두려움이 뒤엉킨 쾌락이야말로 인간을 취하게 한다.
-도박은 신이다. 섬기는 신도들과 수호성인이 있고 그들은 도박이 무언가를 약속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도박을 사랑한다. 도박으로 손해를 봐도 여전히 거기에 헌신한다. 모진 운으로 전 재상을 잃어도 "내가 잘못했지"라고 하며 자신을 탓한다. 도박을 신봉하는 자들은 스스로엑서 잘못을 찾을 뿐 도박 자체가 잘못이라는 불경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작가의 '도박'에 대한 생각을 읽다 보니 불현듯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삼가이와같이 아뢰옵니다]의 '주사위와 등에' 이야기 속에 나오는 노름하는 신이 떠올랐다. 신조차 노름을 즐길 만큼 도박은 매료시키는 점이 있다는 것 아닐까 하고.)
-무지는 행복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필요조건이다. 모든 것을 안다면 우리는 삶을 단 한 시간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삶을 감미롭게, 아니 하다 못해 참을 만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감정들은 모두 거짓에서 비롯되고 착각을 통해 풍성해진다.
(작가의 말에 공감. 행복감은 거짓과 착각,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맞을지도. 그래서 사람들이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철학을 싫어하나 보다.)
-여성들에게는 질투로 인한 상상의 세계가 없다.
(작가는 남성과 여성을 갈라두고 두 성이 무척이나 다른 것처럼, 질투에서조차 다르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이분화적 사고방식 역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질투에 있어 두 성의 차이는 없고 다만 개개인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여성 곁에 있으며 그 무엇도 감정으로 인한 꿈격 같은 경험이나 신앙의 그림자를 이길 수 없으며 이성이 인간 세상을 지배하지 않음을 깨닫는다.(여성이 비합리적이라고 작가는 생각하고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비합리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남성들 역시 비합리적이다. 인간이 대체로 비합리적인 존재인 것이다. 남성은 합리적 여성은 비합리적이라는 이분법은 진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세상이 여성을 비합리적 존재로 정해두고 그 틀에 맞추고자 한다는 것이 더 맞을 것.)
-희극은 인간적일 때 금세 가슴 아파진다. 돈키호테 이야기에 어쩌다 울어보지 않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비교할 바 없는 돈키호테나 캉디드의 이야기에서 평옪면서도 유쾌한 슬픔을 맛본다.
(블랙 코미디의 매력)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읽느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책에 끼워밪추다시피 해서 찾아내기도 한다.
-나 같으면 남녀를 거대한 유인원류와 유사한 모습으로 절대 만들지 않고, 곤충의 형태를 본떳을 것이다. 애벌레의 단계를 거쳐 나비의 형태로 변신하고 생애가 끝날 때까지 오직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일 말고 걱정거리가 없는 곤충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젊음이라는 시기를 인생의 끝자락에 두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생각. 아마도 나비는 공감하지 않을 것 같지만.곤충이 모두 나비인 것도 아니고.)
-지구상에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가슴아파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통과 사랑, 이 둘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무궁무진한 아름다움 이 샘솟는 한 쌍의 원천이다. 아파한다는 것, 이 얼마나 신비롭고 신성한가! 우리가 가진 모든 선함,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모든 것은 다 고통이다. (매저키스트?)
-나의 내면에는 신이 될 소질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약점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의 존재 이유만큼이나 나의 불완전함에 애착을 느낀다. (무한긍정의 힘!)
-고통을 용서하자. 이토록 달콤하면서 쓰라린, 이렇게도 나쁘면서도 좋고, 이상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며, 모든 것들을 포함하며 모든 모순 또한 포용하는 행복은 우리네 인생에서만 느낄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곳이 우리의 정원이기에 우리는 삽을 들고 열심히 땅을 일구어야 한다.
-인간에게 존재 이유와 최종 목적을 가르치므로 종교는 강하고 선하다.
(여전히 종교의 긍정적 가치를 찾고 있는 작가. 인간이 불완전하기에 종교의 자리는 인간과 함께 끝까지 인간세상에 존재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부정적 힘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세상의 전쟁 대부분은 종교가 야기하는 것이기에.)
-신앙의 빛이 모두 사그라진 세상에서 악과 고통은 의미조차 잃어버린 불쾌한 장난이나 음울한 농담에 불과하다.
-지성을 가장 쓸모 있고 즐겁게 사용하려면 여기저기에서 재치 있고 명료한 이해를 끌어내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체계적인 사고나 판단에 대한 집착으로 순수한 즐거움을 망치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 딱 한 시간의 여생이 주어진다면 그렇게 많은 지식으로 머릿속을 채울 필요가 뭐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이 배우겠는ㄱ? 우리는 지나치게 책 속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자연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다행히도 요즘 사람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에서 충분한 시간도 보내지 않는다. 작가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미래가 펼쳐지고 있느느 것이다.)
-우리네 삶에서 최상의 요소는, 삶에서 실제로 찾기 불가능한 무언가를 마주하는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녀원에 관하여'
-수도원의 낭만적인 시적 접근은 샤토브리앙과 몽탈랑베르 시대에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자.
-인간의 본성은 그들(엄격한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방대한 영역이다. 본성은 관능과 금욕주의를 함께 품고 있다.
-그런(수도원의) 삶은 상상력을 소멸시키지만, 쾌활함까지 업애지는 않으니 수녀의 얼굴에 진정으로 깊은 슬픔이 서리는 일은 아주 드물다.
-수도원의 금욕적인 삶을 통해 죽음에 대해 아주 잘 준비하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는 죽음 자체가 문제되지 않고 다른 일에 신경 쓴다. 촛농이 떨어지는 초를 잘 정돈하고 나서야 숨을 거두었다니. 철저하게 성스러운 삶을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과연 이보다 좋은 이야기가 있을까.
'그날 밤 알파벳의 기원에 관해 어느 유령과 나눈 이야기
(페니키아의 왕자 카드모스의 유령과 만나 그가 그리스에 전했다고 하는 페니키아 알파벳 문자를 예찬)
-방에 드리운 어둠을 신비했다. 잠들어 있는 모든 책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책으로 가득한 서재에 유령들이 출현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 어디 있는가. 자신들의 기억을 보존하는 기호들이 모여 있는 서재가 아니면 죽은 이들의 영혼이 어디에 나타난다는 말인가?
'여성들의 커리어'
(저자의 여성교육에 대한 생각은 당시에는 진보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보면 남성과 여성의 교육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생각의 한계를 드러낸다.)
-현학적인 여성은 끔찍하지만 과도하게 혐오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
-무정부주의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은 여성과 관련해서는 철저한 가부장적 태도를 견지.
-여성은 남성보다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글을 쓰는 것이 잘못이 아니며,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글을 쓴다고 생각한 작가.
'기적에 대하여'
(합리적인 판단, 과학적 사유를 긍정하는 저자)
-기적은 유치한 개념
-인간의 과학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균, 별, 혹은 질병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할 무지의 이름으로 모든 기적을 부정해야 한다.
'카드로 지은 성'
(권위에 의존한 오류에 대해서는 생각해 봄직하다.)
-인간은 절대 논리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본능과 감정이 인간을 이끈다. 인간은 본능과 감정이 가져오는 열정에, 사랑과 증오에, 무엇보다 구원과 관련된 공포감에 굴복하낟. 인간은 철학보다 종교를 선호하고, 오직 자신의 나쁜 행동과 못된 성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만 논리를 내세운다.
'엘리시온 평원에서'
(웃긴다!!)
'아리스토스와 폴리필로스 혹은 형이상학적 언어'
-생각을 희석하기 좋아하는 형이상학자들의 취향, 즉 긍정을 부정으로 바꾸는 단어들을 선호하는 성향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의 단어를 좋아하는 취향은 추상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지닌 자연스러운 욕구를 충족시킵니다.(폴리필로스)
-오랫동안 여기저기에서 사용하던 끝에, 아득한 옛날부터 본래 표면에 새겨져 있던 초상의 흔적을 모두 잃어버린 단어들-신, 영혼
-형이상학자들은 그들의 철학체계를 만들 때, 야만인들이 기쁨과 욕망과 걱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 언어적 기호들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찌꺼기를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폴리필로스)
'소수도원'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상태가 사실은 지식이 축적된 야만 상태일 뿐이라고 굳게 믿네.
-먹이를 주면 동물들은 힘을 얻고 그렇게 얻은 힘을 동물들은 허비하지 않네.
*21세기에 읽기에는 저자의 정신이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있어 굳이 이 책을 현대에 짬을 내서 독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간이 넘쳐 주체하기 어려우면 읽어도 나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