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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으로] 10인의 여성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자기만의 방' 이야기

Livcha 2024. 5. 14. 16:00

[자기만의 방으로] 책표지

[자기만의 방으로]라는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떠올랐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옷을 만들거나 하는 여성 10인에게 '자기만의 방'이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다. 

'자기만의 방'이란 자기만의 방일 수도 있지만 책상일 수도 있고 집일수도 있고 집과 별개인 작업실일 수도 있고 일터인 책방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방은 닫힌 공간이기도 하지만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곳이기도 하지만 타인과 관계맺는 곳이기도 하다. 

 

목차

안희연의 [우리 내면의 무언가가 말할 때]

-나의 우주, 나의 책상 위는 언제나 더럽다. 책상을 괜히 우주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질이 카오스라면 나의 책상 위는 노트북과 마우스가 놓인 딱 어깨너비만큼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책에 점령당해 있다.

(이 대목을 읽는데 내 책상이 떠올랐다. 바로 지금 블로깅을 하고 있는 내 책상은 지극히 복잡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책상은 항상 복잡해서 책 한 권을 놓고 읽을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책상이 좁아서가 아니었다. 책상이 좁아서 큰 식탁을 책상을 대신해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큰 책상에서 일을 하지만 그래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 위 글을 쓴 작가는 책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 책상은 책을 포함해서 온갖 물건들 때문에 어지럽다. 한 번씩 질서를 잡아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소용없다. 아무튼 내 책상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면의 무언가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책상에 앉으면 수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

(이 작가에게 있어 자기만의 방은 내면의 무언가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곳이다.)

 

송은정의 [단 한 사람을 위한 책상]

-나는 그 글이 나만의 어디로든 문이 되길 고대하고 있다. 문을 열면 그곳에 단 한 사람을 위한 책상 하나가 놓여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자기만의 방은 내면의 방이다. )

 

서수연의 [열병합방식으로 그리는 일]

-작은 집을 점점 카페 짐과 아이들의 물건으로 그득했고 내 시간은 카페 일과 아이들을 위한 시간으로 채워졌지만, 비관하기 싫었다.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니까 나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림 그리는 작가가 해야 할 일-돈벌이와 육아-을 하면서도 그림 그릴 시간과 공간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진다.)

 

고운의 [가장 작은 방에서 짓는 것들]

-기혼여성, 특히 자녀가 있는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드문 일일 것이다. 때론 방을 가지는 것이 내 고집이나 욕심처럼 보였다. 

-요즈음의 내 화두는 언제 어떻게 방을 뺄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내 방을 내주는 날, 나도 새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중이다.

(기혼여성이나 기혼남성이나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 같다. 내 남동생이 떠오르는데 두 아들의 아버지로 둘째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까지 자기의 방을 고집했었다. 물론 이때는 아들에게 자기 방의 일부를 나눠주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러다가 둘째 아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결국 자기방을 둘째 아들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그 방에는 내 남동생의 짐 일부가 아직도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그 짐은 자기 공간에 대한 미련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리 좁은 아파트도 아니지만 두 아이와 함께 사는 부모가 자기만의 방을 고집하기는 어렵다. 내 남동생은 오랫동안 자기만의 방을 고집하고 결국에 베란다를 자기만의 공간으로 삼았지만 내 올케는 단 한 번도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나마 동생부부는 직장이라는 공간으로 이동해서 긴 낮시간동안 사무실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열망이 작가나 예술가보다는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작업을 위해 궁리하고 작업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 작업을 위한 공간이 절실할 것은 분명하다. 지인 중 그림작업을 할 자기 작업실을 갖고 싶어 고민하고 투쟁하는 이도 있다. 별도로 작업실을 낼 금전적 여유가 없으니 아파트 안의 한 공간을 작업실로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했지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자기만의 작업실에 대한 열망이 식지는 않을 것이다.)

 

휘리의 [열린 문, 한 뼘의 틈]

-이사를 자주 하지 않았으니, 내 인생에서 방은 딱 세 곳이었고 그마저도 두 번은 한 집에서 옮긴 것이다.

(이 구절을 읽는 데 수없이 이사를 하면 지금껏 살아온 나의 방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은 청소년 시기였다. 고등학생때였나? 남향의 햇살좋은 2층에 위치한 제법 넓은 나만의 방을 갖게 되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서울로 유학하면서 기숙사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때는 2인1실이라서 친구랑 같은 방을 사용했다. 이때는 자기만의 방이라기보다는 나만의 책상이 나만의 공간이었던 것 같다. 1년 기숙사생활을 청산하고 셋방을 얻었다. 2층집의 2층에 위한 방 한 칸에서 친구랑 같이 지냈다. 역시나 나만의 방은 아니고 나만의 책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다른 집으로 이사해서 셋방살이를 이어갔다. 2층의 방 한칸과 욕실을 사용했다. 역시나 이때도 친구랑 방을 공유했다. 친구가 그 방을 나가자 홀로 셋방을 사용했으니 나만의 방이었다. 그리고 하숙집생활. 이번에도 친구와 같은 방에 기거해야 했다. 그리고 홀로 셋방살이, 이어 홀로 6평 아파트살이, 동생이랑 아파트살이...그 후로도 여러 방, 아파트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파트너와 현재 아파트에 기거하게 되고 정착하는 삶으로 접어들었다. 나의 인생을 글로 쓰면 장문의 글이 될 것 같다. 기억이 맞다면 대략 20번의 이사를 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이사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 게다가 여행지의 숙소까지 더해야 한다면 내가 머물렀던 나만의 공간은 그 수가 어마어마할 듯.)

-계속 사랑하는 장소가 사라지는 풍경, 곁에 있는 사람이 사라지는 풍경, 끝내 내가 사라지는 풍경. 그 풍경을 알아 차릴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순간이 다시 기뻐질 수 있다. 

(글에는 한 마디로 상실에 대한 슬픔, 그 슬픔을 넘어가설 수 있게 하는 변화에 대한 수용과 타인에게 열림에 대한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기만의 방은 변화와 열림, 그리고 연결의 매개체다. )

 

박세미의 [나를 구축하는 질료들]

-여기 있다가 저기에 있는 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방. 정말이지 내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방에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질료들을 붙잡는다. 

(매 번 바뀌는 자기만의 방을 채우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두는 작가는 어쩌면 변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방을 채우는 것조차 무상한 법. 애초에 공간은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부족해보인다.)

 

신지혜의 [세 개의 집, 두 권의 책]

 

 

나는 개인적으로 10편의 글 가운데 신지혜의 글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11번째의 집, 12번째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작가의 외로움이 강렬하게 전해져온다. 

타인과의 연결을 위해 발버둥쳐보지만 결국 포기하고 외로움에 안주해보려는 노력이 슬퍼서 이 글이 더 인상적이었나 보다. 

 

-나는 누군가와 함게 살고 싶었던 집을 떠나며 나만의 집을 선택했다. 물리적으로 열악한 집을 사람으로 채워 집 같은 분위기로 만들려던 시도는 매번 실패했다. 사람에게 기대지 않아도 충분한 집, 집 자체로 집다운 집을 원했다. 사람들이 떠나갈 때마다 찾아오는 공허함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임시방편 같지 않은 삶을 꾸리고 싶었다. 집에 사람을 들인지 오래되었고 나는 이 외로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사람을 찾아 밖을 나도는 일도 아예 없어졌다. 이 집에서 나는 혼자 마음껏 고독할 수 있다. 집에 틀어박혀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늘었지만 어쩐지 나의 세계는 확장되고 있다.

(집답지 않은 집, 가짜 가족, 공간도 그 속의 사람도 작가를 외롭게 만들었던 것 같다. 집다운 집을 찾아나가는 노력은 외로움을 껴안는 노력과 함께 한다. 개인적으로 집이 부족하다고 해도 함께 하는 사람이 주는 온기가 그 부족함을 어느 정도 채워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 집이 더 부족해보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예희의 [내가 있는 곳 어디든]

-여행의 '숙소'이긴 하지만 '집'이라 부르면 왠지 각별하게 느껴져서 좋다. 

(이 작가처럼 나도 여행지의 숙소도 집처럼 느껴졌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공간은 어디든 집이 맞다는 생각이다. )

-1인 가구의 삶. 조금은 외롭고 가끔은 쓸쓸하지만 대체로 만족스럽다. 가족과 함께 살 때는 '나만의 방'에 대한 애정을 깊이 느껴본 기억이 없다. 

(누군가 함께 살 때는 '나만의 방'에 대한 생각이 더 강력하긴 하다. 그럼에도 타인과 함께 하는 공간 속의 '나만의 공간'은 중요하다. 파트너와 함께 하는 삶이지만 우리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한다. 이런 존중이 함께 하는 삶을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 같다.)

-여행지의 숙소도 그때만큼은 내 집, 바퀴 달린 자동차도 포근한 내 집이다. 영원히 포근하고 완벽히 안전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런 공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테니. 그저 나는 매번 약간의 돈과 시간과 노력을 더해 공간을 다듬으려 노력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최선을 다해 쾌적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려고 한다.

(우리 각자의 이상적인 자기만의 방은 우리 머릿 속에 존재할 뿐. 현실 속의 자기만의 방, 집 등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것이 맞다. 너무 욕심내지 않는 것이 행복의 길.)

 

이소영의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작업실 밖으로 자주 나선다. 자립하기 위해 운전을 시작했다면 바깥으로 나서는 일은 고립되지 않기 위함이다.

(다른 생명체들과의 교감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작가는 절대로 고립되지 않을 것 같다. 삶은 나 홀로 둥지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나를 보살피기 위해 숨기도 하는 장소가 필요하다.)

-나의 작업실만큼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늘 나 혼자만 이곳에 있길 원치 않는다. 

(나만의 공간이 나를 완전히 가두는 공간이 되는 것을 경계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무루의 [나에게로 이르는 길]

-그러니까 작업실 생활은 내게 일종의 평형추인 셈이다. 일을 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본래의 목적보다도 어쩌면 일정 시간 타인과 연결될 수 있어서 이 장소가 내게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저 깊은 곳에 언젠가 내가 다다를 방이 하나 있다. 앞으로 내 생의 모든 여정은 그곳으로 향하는 일일 것이다.

(궁극적인 자기만의 방은 내면에 있다고 본다. )

 

* 10편의 글을 읽다 보면 자기만의 방이란 내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머무는 여러 공간적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만의 방은 자신의 외로움을 거두는 곳이 되기도 하고 그 외로움을 떨치고 바깥과 연결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구는 자기만의 공간 속에 외로움을 끌어안고 숨어들고 또 다른 사람은 자기만의 공간이 폐쇄적인 곳이 되지 않도록 애쓴다.     

또 자기만의 방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곳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내면 속에 자기만의 방을 만든다. 

 

10인의 여성이 들려주는 자기만의 방 이야기는 다채롭고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