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일상을 위한 힌트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 카를로 페트리니의 '미식'

Livcha 2021. 7. 29. 18:12

슬로푸드 운동의 창시자인 카를로 페트리니(Carlo petrini, 1949-)의 책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2005)]를 구입한 후, 책꽂이에 꽂아둔 세월이 제법 흘렀다. 우리나라는 이후출판사에서 2008년 번역출간했으니, 이 책을 구입한 지 거의 10년이 흘렀다는 이야기다. 그 사이 조금 읽다가 꽂아두고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완독을 해냈다. 때로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 책 읽기를 끝내는 책들도 있다. 지금 아직도 읽히지 못한 채 책꽂이에 꽂혀 있는 다른 책들도 어서 읽어주오, 하며 내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이 내 등을 간지럽힌다.

아무튼 그가 이야기하는 미식학에 대한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그야 말로 음식 세계의 에피쿠로스다 싶다. 저자는 깨끗한 음식, 공정한 음식, 지속가능한 음식을 좋은 음식으로 생각하며 이 음식을 절제의 원리에 따라 추구하는 것을 미식으로 본다. 그는 음식의 쾌락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먹을거리의 진정한 쾌락주의를 추구하려는 자가 있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노트-이어지는 생각>

1부 무엇을 먹을 것인가?>

결국 산업형 농업과 현대화는 음식 그릇을 텅 비워버렸다. 그 결과 아주 흔한 농산물 중에서도 몇몇 경작 가능한 종들만 도입하게 되었고, 이 지역 사람들은 두 세대를 지나기 전에 한때 무상으로 이용 가능했던 자연의 결실들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게 해주었던 전통 지식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일기2 멕시코 떼우아깐)

-비단 멕시코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도 별 다르지 않으리라. 집주위에 지천으로 자라는 식물들을 통해 영양을 섭취하고 몸을 치료하는 법을 우리도 거의 잊었다. 주변의 풀들을 살펴보면서 놀라게 되는데, 그 풀들이 예전에는 의학적 용도도 먹을거리도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다. 조상들에게는 익숙했던 지식을 우리는 힘들여 애써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긴 뿔은 아래로 휘고 눈 주위에는 검은 원이 둘러쳐져 있는 암갈색 소들을 다시 방목장에서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소들의 뿔로는 칼의 손잡이도 만들 수 있죠. 그리고 이제 당신은 여기 프랑스에서 가장 훌류한 식당 중 한 곳에서 내 앞에 앉아 있는 우리 라귀올 치즈를 브라로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고 있죠. (일기3 프랑스 라귀올) 

-나는 프랑스에 있을 때 라귀올(Laguiole) 칼을 꼭 갖고 싶었었다. 멋진 소뿔로 만들어진 칼은 내 주머니 형편에 비해 너무 비쌌다. 그런데 왜 그토록 그 칼이 비싸야 했는지 이제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칼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라귀올 치즈도 맛보지 못했었다. 아마 지금 프랑스에 다시 간다면 라귀올 치즈맛도 보고 싶을 것이다. 지역 전통을 지켜낸다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맞서 무척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따라서 그 가치를 이해하는 소비자들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그 산물을 구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라귀올 칼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서양식 농업의 역사는 먼저 우리에게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은 18세기 후반부에 콩과 식물과 가축 사료를 윤작으로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시작되었다. 이것은 혁명적인 발전이었는데, 토양이 과거보다 더 효과적이면서도 더 빠르게 빙옥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것은, 당시 윤작이 항상 자연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로 인해 목축업 또한 부흥하게 되었다. (5장 이래도 농산업을 고집하겠는가)

-자연순환을 존중하는 농사에 대한 인식은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인간이 생존할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부 미식학, 그리고 새로운 미식학>

음식은 현재 세계와 과거 역사의 복잡함을, 문화들 간의 뒤얽힌 관계를, 다양한 생산철학들 간의 공통점을 보여준다. 

 

미식학이 정의되기 시작하고 주요한 추진력이 프랑스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 19세기 초반이었던 것

-나는 '미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에 있었다. 맛을 과도한 탐미,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카를로 페트리니가 말하는 미식학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음식을 통한 생존과 즐거움을 이렇게 거짓으로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분리는 분명 지나친 미식에 대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미국의 대도시에 있는 극빈층 아이들과 십대들이 더 이상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모들이 요리를 전혀 하지 않고 가족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함께 모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먹을 거리는 수퍼마켓이나 지역의 패스트푸드 식상에서 이미 만들어진 식사의 형태로 구입한다.(일기5 앨리스 워터스)

미국만의 문제일까. 나는 프랑스 기숙사에서 만났던 프랑스 청년이 떠오른다. 그 청년의 가정도 무척 가난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요리라는 것이 통조림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척 슬펐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라고 다를까. 가난할수록 형편없는 가공식품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음식이라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여유가 허용될 때만이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문화로 생각된다. 

 

생태적 감수성이 없는 미식사는 바보지만, 미식가적 감수성이 없는 생태주의자는 자기가 원하는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쌍한 사람이다.(일기6 '식량의 미래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하면서)

-'생태적 감수성 없는 미식가는 바보, 미식가적 감수성 없는 생태주의자는 가련'으로 정리해본다. 완전 공감. 기억해두고 싶은 말.

 

즐거움은 생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권리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최상의 방식을 고안해서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일기6 '식량의 미래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하면서) 

-즐거움은 인간의 권리! 역시 완전공감. 우리는 누구든 삶을 풍요롭게 살려면 쾌락주의자여야 한다고 본다. 

 

나는 좋은 음식은 사실상 가장 쓸모 있는 치료수단으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모든 종류의 통증을 덜어주고 좀 더 참을 만하게 해주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일기7 즐거움과 건강)

-좋은 음식은 통증완화, 치료수단임 역시 공감. 

 

연구 모음집인 [위험한 수확]에는 미국의 생물다양성 감소와 관련된 일부 자료가 실려 있다. 토마토는 1903년과 1983년 사이에 80.6%의 종류가 멸종되었고, 같은 기간 상추는 92.8%, 사과는 86.2%, 사료용 옥수수는 90.8%, 사탕옥수수는 96.1%가 멸종되었다. 현존하는 5천 종 이상의 감자 중에서 오직 4개 종만이 미국에서 상업 목적으로 주로 재배되고 있고, 콩은 오직 2개 종만이 미국에서 96%가 재배되고 있으며 옥수수는 6개 종이 전체의 71%를 차지하고 있다.(9장 새로운 미식학의 정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농업의 산업화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성을 없애는 과정인가를 알 수 있다. 무시무시하다. 

 

유기농도 단종 재배라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종만을 대량으로 생산한다면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킴으로써 환경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생태계에 낯선 외래종을 도입하는 경우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것이 설사 유기농이라 할지라도 환경에 이질적이기 때문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9장 새로운 미식학의 정의)

-우리가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유기농이라고 모두 선한 먹을거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토착종의 자리를 빼앗는 것, 모두 유기농이라고 할지라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잊지 말아야겠다. 

 

나는 즐거움과 놀이를 좇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고 이 목적을 이루고 싶다. 오히려 나는 맛이라는 지점에서 시작하겠다. '좋은 맛'은 음식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즉각적인 느낌이다. 좋은 맛을 추구하는 것은 깨끗하고 공정한, 다시 말해서 지속가능한 식량생산을 증진시키기 위해 우리가 소유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3부 온전한 음식>

음식은 시간과 함께 변하고 전통도 그렇다. 음식은 불변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미식가의 미각적, 후각적 기억은 은행과도 같아서 자신이 일생동안 경험한 지식과 맛을 진열장에 과일을 쌓듯 보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식가와 그의 일부인 문화는 감각에 대한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더 많은 기억들이 깨어 있을수록 미식학적 지식을 덜 잃을 수 있을 것이다. 

-맛의 기억이라... 어린 시절 정성껏 만든 좋은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와 통조림과 패스트푸드를 먹고 자란 아이의 삶은 분명 차이가 날 것이다. 

 

나에게서 먹는 즐거움을 빼앗지 않고, 음식이 나 자신에게나 생태계, 그리고 그 음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음식의 값이 쌀수록 더 많이 먹는다. 

 

원재료가 자연적으로 완전한 것일수록 좋은 음식의 완성도와 좋은 음식에 대한 인식가능성 또한 커진다. 

 

기술이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을 남용하거나 낭비하지 않으면, 그리고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의 균형을 바꾸지 않는다면 기술 또한 자연적일 수 있다. 

-음식 자체도 자연 속에서 채집해 생으로 먹지 않는 이상, 문화적 요소가 결부될 수밖에 없다. 기술을 배제한 음식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다. 기술이 자연을 존중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적정기술이 음식문화 속에서도 생각될 수 있다. 

 

즐거움은 개인적 영역에 갇힌 자기성찰이 절대 아니며, 그보다는 재배에서 섭취까지, 쇼핑에서 요리까지, 식량체계에 대한 연구에서 식량이 부족한 세계 다른 지역을 위한 과학적 연구개발 프로그램까지 모든 미식학적 행위에 스며 있고 이를 안내하는 삶의 의식적인 철학이다. 

음식관련 고차원적 쾌락주의 지침.

 

생산은 한곳에 집중되고 소수 인종들을 착취하고 단종 재재하며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자유시장에서 값을 결정합니다.(일기10 녹색 캘리포니아)

 

양질의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마지막 세 번째 전제조건은 그것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량 생산에서 '공정함'이라는 단어는 사회적 정의, 노동자와 그들의 노하우, 시골의 풍습과 농촌의 삶에 대한 존중, 노동에 걸맞는 보수, 훌륭한 생산물에 대한 만족, 사회에서의 역사적 지위가 언제나 최하위를 차지해 왔던 소농들에 대한 명확한 재평가 등을 의미하고 있다.(12장 공정한 음식)

공정한 음식을 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공정한 음식이 좋은 음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있어야 한다.

 

4부 슬로푸드를 향한 세 가지 실천

내 감각이 미각을 되살려주었다. 감각이 미각을 만들었다. 내가 먹을 거리의 재료와 생산 기술의 중요성을 이해하자마자, 알고 싶은 욕구가 자라났다. 맛보는 행위에서 시작해 간단한 미식 비평, 그리고 생산자, 생산지, 생산 기술에 대해 직접 알고 싶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지점에서 식물학, 축산학, 요리, 산업, 전통 수공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맛의 차이로 나타나는 생산기술의 작은 차이들과, 요리방법과 최종 결과물을 변화시키는 품종 사이의 차이에 대해 배웠다. 원료와 생산기술에 대한 지식은 내게 필수적인 것이었다. 최종 생산물에 대한 분석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분석은 생산물 역사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했다. 

-카를로 페트리니의 슬로푸드 운동은 단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천천히 한걸음씩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전의 농부는 땅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생산 라인 위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모던 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이 그랬던 것처럼 소외되었다고 느끼고 있다. 농부들은 되도록 많이 생산하고 판매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땅과 동물에게 약을 투여하면서 축사와 광대한 들판에서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땅이 죽어도 상관없고 먹을거리가 순수하고 자연적이지 않아도 상관없고 맛이 없어도 상관없다. 이런 경우 농부는 누가 그것을 먹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생산은 완전히 산업적으로, 규모의 경제가 된다.

-우리가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마트에서 구입하는 먹을거리가 바로 소외된 농부들의 산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소비자와 생산자인 농부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다 못해 차단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나태한 소비자는 생산과정 따위는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5부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

사프미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에 있으며, 7만 명의 사람들이 공식적인 국경 없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내가 만났던 사미들은 테라 마드레에 참석했던 사람들인데, 이들은 순록 떼를 따라 이동하는, 약 3천 명으로 이루어진 유목 공동체다. 순록을 돌보는 것이 주된 일이며 순록으로 여러 가지 생산물, 예를 들어 수오바스도 만든다. 수오바스는 순록이 멸정할 위기에 처하면서 함께 사라지고 있는데 슬로푸드 운동에서 보호하려고 노력 중이다.(일기14 사미와 몽골사람들) 

-사프미에 대한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좀더 알아보고 싶다.

 

절약이 축적 놀리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낀 것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절약이 나눔을 위한 행위, 기억해둬야겠다.

 

우리가 미식학의 더 복잡하고 중요한 의미들을 잊기 전에, 그것이 민속적 활동이 되기 전에, 과잉과 엘리트주의적 부가 그것의 특징이 ㅗ디기 전에, 미식학 그 자체는 중용과 절제라는 관습을 가진 정직한 과학이 되어야 한다. 여전히 이러한 측면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바르톨로메오 스카피(Bartolomeo Scappi, 1500-1577), 일명 일 플라티노의 저서 [정직한 기쁨에 관해서]라는 책이다. 거기에는 잘 먹기 위한 규칙들과 나란히, 정직한 향락이 존재한다. 이 향락은 책임감 있는 소비, 과한 것은 늘 나쁘다는 인식 속에서 기쁨을 고양시킨다. 왜냐하면 과함이란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서, 언제나 무언가, 누군가에게서 부유함과 안녕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심각한 불균형이 비틀거리는 우리 지구를 짓누르고 있는 오늘날 과함은 더더욱 좋지 않다. 이러한 불균형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일하는 수백만 명의 농부들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 따라서 절제의 원리를 따르는 것은 공동선을 위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새로운 미식가들에게 궁극적인 규칙이다. 

-5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글에서 카를로 페트리니가 바로 에피쿠로스의 계보를 뒤따르는 쾌락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절제의 원리를 지키는 향략. 그는 '정직한 향락'이라 표현했다. 즐거움을 무한과 과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중용에서 찾는 것.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진정한 쾌락주의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본다. 

 

이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그 시간을 들인 것은 잘 했다 싶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도 나는 이 책은 버리지 않고 주지도 않고 내 서가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그리고 한 번씩 펼쳐보면서 '절제하는 미식'에 대해 사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