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널드 홀테인(Theodore Arnold Haultain, 1857-1941)의 [어느 인문학자의 걷기예찬(Of Walks and Walking Tours), 프로젝트A, 2016]은 시골길을 홀로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느끼고 풍경 속의 생명체들을 만나고 사색하고 시나 산문도 떠올리며 걷길 좋아했던 영국인의 글들을 담았다. 이 글들은 1903년부터 1904년까지 미국잡지에 기고했던 것이라고 한다.
궁금한 점 하나. 굳이 제목에 인문학자라는 단어를 넣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자는 다음 구절을 미루어보건대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어떤 사상도 자가생식하는 법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책 또한 낳아준 부모와 혈통이 존재한다."(들어가며 중에서)
그리고 저자의 시골에서의 걷기에 대한 예찬이 대단하다는 것. 자신을 시인 워즈워드의 계보 위에 올려두고 싶은가 보다. 모든 것은 무한으로 향한다'란 제목을 단 그의 글은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준다. 그는 걷기 자체에 몰입하는 것, 걸으며 만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 자연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 자연의 아름다움은 신비로움에 있다는 것. 그의 걷기에 대한 열정은 진심이다. 다만 그가 걸으며 느낀 바를 표현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 아쉽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인용으로 자신의 감정을 대신한 듯하다. 그 덕분에 책이 따분해졌다. 그래도 그가 조언자로 선정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장 자크 루소의 책을 직접 찾아서 읽어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이번 기회에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의 일기]를 한 번 읽어볼까 싶다.
덧붙이자면...
저자는 도보여행에 구비해야 할 식량으로 베이컨, 밀가루, 콩, 그리고 말린 과일과 쌀, 차, 후추, 소금, 설탕, 초콜릿, 우유를 이야기한다. 노숙하면서 요리도 해가면 걷는다는 이야기. 요즘처럼 아무데서나 불을 피울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저자의 조언이 그리 도움이 되진 않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은 없지만 자크 라카리에르는 빵, 치즈, 버터, 술을 챙겼던 것 같다. 도보여행자가 오래 걸으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먹을 것도 최소한 간단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다. 자크 라카리에르만 해도 70년대 도보여행자이고 아널드 홀테인은 20세기 초의 도보여행자이라서 도보상황이 확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축식량이 다른 것은 당연. 21세기 도보여행자인 내 경우는 프랑스 브르타뉴에서 걸을 때는 빵, 치즈, 사과, 초콜릿, 물 등을 챙겼다.
그리고 요즘 도보여행자는 카메라를 거의 대부분 챙기겠지만 20세기초반에 카메라를 가진 자라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쓰거나 스케치할 노트 혹은 카메라도 챙겨라. 모든 도보여행자는 저마다 취미가 있기 마련이다."('걷기 여행자의 짐은 철저해야 한다' 중에서). 이 저자는 분명 여유 있는 도보 여행자였을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자유로이 이동해서 걸었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한가로운 사람이니 시골을 슬슬 걸어다니면서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여기저기 장거리 이동을 하면서 한가롭게 걸으면서 지내는 사람이라면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적 여유 없이는 힘들 것 같다.
저자는 홀로 시골길을 걷는 것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난 꼭 홀로 걷지 않아도, 시골길을 걷지 않아도 걷기 자체는 마음에 평화, 만족감를 안겨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생각해보고 싶은 대목.
"위대한 자연은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져 나무말뚝, 냇가 돌계단, 심지어 벽돌담조차-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부드럽게 만든다."('가을 환상곡, 적막은 대자연의 놀라운 힘이다' 중에서)
"때때로 일몰 장면이나 평범한 경치, 푸른 초원, 혹은 어린 고사리가 어느 순간 귀가 멍멍하고 어지러울 만큼 강렬한 환희와 전율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지 않는가?"('다시 캐나다의 가을을 걷다' 중에서)
"걷기에 대한 관심과 즐거움을 강화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잠깐 걷는 것만으로도 눈에 마주치는 수천 가지 자연 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자질이다. 그밖에 없다. 마음 속에서 자질구레한 근심거리를 재빨리 내쫓을 수 있는 것으로 몰입 같은 자질만한 것은 없다. 몰입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법이다."('모든 것은 무한으로 향한다' 중에서)
"미는 느끼는 것이다.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자연의 미는 마음에 호소한다. 지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한다. 현명한 대학자일지라도 갓난아이 눈에 띤 자연을 보지 못할 수 있다."('모든 것은 무한으로 향한다' 중에서)
"우리가 섬세한 화관을 볼 때 마음 속에서 불꽃같은 게 타오르는 까닭은 뭘까. 화관이 지닌 놀라운 구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도 아니요, 형언할 수 없는 색채만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감정이다. 우리가 지고지순함에 대한 명상에 잠기는 것은 측정할 수 없이 먼 곳에서 오는 별빛의 강렬함 때문도 아니요, 산더미만한 구름 때문만도 아니다. 만물에 깃들어 있고 만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내재적이고 영원한 '신비'다. 신비는 옛날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모든 것은 무한으로 향한다' 중에서)
"우리는 가능하면 자주 동틀 녁 이슬로 목마른 영혼을 적셔줄 필요가 있다. 또 가능하면 자주 책상, 사무실, 계산대로부터 벗어나-아니, 공과 배트와 골프채로부터 벗어나-고요한 시골로 스며들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감당하기에 벅찬 일들로 가득하다."('걷기는 해결사다, 걷다 보면 모든 게 해결된다' 중에서)
"그런데 어쩌겠는가. 도무지 모든 게 가치 없다고 느껴지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때는 한바탕 잔치에도 넌더리나고, 슬픔에도 마음이 요동치기는커녕 무덤덤해진다. 그때는 모두 부질없어 보이고 모든 걸 쉽게 포기해버린다.
그럴 때는 두꺼운 부츠를 꺼내 신고, 튼튼한 지팡이를 움켜쥐고 나서 시골 속으로 걸어라. 궂은 날이든 맑은 날이든 상관하지 마라. 상식에도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시도해 보라."('걷기는 해결사다, 걷다 보면 모든 게 해결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