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일곱의 나이에도 자립적으로 삶을 꾸려내는 할머니, 이옥남,이미 그 자체만 해도 경이롭다.
긴 세월을 노동하며 정직하게 살고,
그리고 누구나 꿈꾸는 삶의 마지막 시기에도 삶의 질을 유지하고 최대한 자립적인 일상을 꾸리는 이옥남 할머니.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귀한 책이다 싶다.
90대의 글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은 그만큼 삶을 살아낸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고,
또 90대 여성의 글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오늘날 90대를 살아가는 여성들 가운데 자신의 삶, 감정을 글로 표현한 여성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옥남 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글자를 읽고 써고 싶어했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을 뿐만 아니라,
열 일곱의 나이에 결혼을 해서는 어린 시절 어깨 너머로 깨친 한글을 안다는 사실을 남편과 시집식구에게 내보이지 않고 꽁꽁 마음 속에 숨겨놓았다.
시부모와 남편이 모두 세상을 뜬 다음, 할머니는 그토록 읽고 쓰고 싶어했던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밤이면 일기를 써내려갔다.
그 세월이 30년을 넘어간다.
외손주 덕분에 일기를 책으로도 내게 되었다.
우리가 읽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사연을 가진 책.
60대 후반부터 써내려간 할머니의 일기를 읽으면 할머니의 삶은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각기 제 길을 가면서 할머니 곁을 떠나간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일상을 꾸리기 위한 밭일, 그리고 힘들게 키워낸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
할머니 일상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기는 특별하다.
할머니는 일도 하시지만 책도 읽고 글도 쓴다.
또 평생 몸으로 노동을 해온 사람답게 자연에 민감하고, 계절에, 날씨에 민감하다.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다른 생명들, 새들, 풀들에 대해서 아파하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물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파한다. 뭔가 나눠보려고 애쓴다.
"그저 풀을 벗을 삼고 옥수수도 가꾸고 콩도 가꾸고 모든 깨고 콩이고 조이와 팥도 가꾼다.
그러면서도 뭣이든지 키우기 위해 무성하게 잘 크는 풀을 뽑으니 내가 맘은 안 편하다.
그러나 안 하면 농사가 안 되니 할 수 없이 또 풀을 뽑고 김을 맨다.
뽑아놓은 풀이 햇볕에 말르는 것을 보면 나도 맘은 안 좋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할 수 없이 또 짐을 매고 풀을 뽑으며 죄를 짓는다."(85세)
"뻐꾹새 우는 소리가 오늘은 전혀 안 들리네. 비가 오니 새는 귀찮겠지."(78세)
"낮에는 뻐꾹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을 하고 밤에는 솟종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쓴다."(82세)
"애비가 바다에 가서 방게를 잡아와서 그것을 간장에다 끓이니 너무 잔인한 생각이 든다.
죄가 될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다."(77세)
"작은 책이 와 있어서 지금까지 계속 보고 있다.
맘 같아서 대번 다 읽고 싶은데 밤에는 글씨가 작아서 눈 어두워서 못 읽고 겨우 낮에만 읽으니 답답하다."(80세)
"자식이란 무엇인지 늘 궁금하니까 늘 기다려진다."(80세)
"하루종일 잘 놀다가 다섯 시에 집에 왔다.
대단히 하는 일도 없는데 너무 피곤해서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오고 말았다.
집에 와서 아무 일도 없으니 심심해서 또 몇 자 적어본다."(87세)
"맘 같아서는 새도 모이를 주고 싶은데 개와 오리 닭은 모이를 주고 나면 새들도 걸린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금년 겨울에는 부엉새도 안 운다.
요즘에는 새소리라고 못 듣겠네."(86세)
할머니의 섬세하고 인정있는 마음이 고와서 절로 제 마음도 따뜻해진다.
손자가 쓴 '할머니 이야기'에서 할머니가 물난리 만난 사람들에게 보내 줄 것을 챙기면 하셨다는 말, 정말 감동적이다.
"내가 필요 없는 걸 주면 그것도 죄여. 내가 아까워하는 걸 줘야지"하셨다고.
할머니가 남은 여생도 사시던 곳에서 사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돌아가시지 않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