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심화, 확장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일상생활의 구조(상)

Livcha 2021. 6. 1. 11:25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아날학파의 대표적인 학자 중 한 사람이다.

아날학파(L'Ecole des Annales)는 루시앙 페브르(Lucien Febvre, 1878-1956)와 마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에 의해 1920년대말에  시작된 프랑스 역사학의 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역사를 총괄적이고 전체주의적 시선에서 포착하며 사회현상들을 장기적으로 다룬다. 페르낭 브로델은 아날학파 2세대로 분류된다. 그는 단기적 사건보다 장기적인 사회변화, 특히 경제사에 관심을 갖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아날학파 학자로는 조르쥬 뒤비, 필립 아리에스가 있다.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는 1995년 까치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1979년 Armand Colin출판사에서 출간한 [Civilisation matérielle, économie et capitalisme: XVe-XVIIIe siècle; tome I(물질문명, 경제와 자본주의:15세기-18세기(1권)]을 나눠 번역출간했다. 1권을 1,2부를 나눈 것이다. 1권의 1부에서는 제1장 수의 무게, 제2장 일상의 양식:빵, 제3장 사치품과 일상용품:음식과 음료, 제4장 사치와 일상용품: 주택, 의복 그리고 유행을 담았다.

이 책에서 거론하는 극동아시아와 관련한 부분은 그리 정확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사와 관련해서는 충분히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일상생활 속 의식주의 변천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인데, 이 책은 그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빵, 생선 대구, 차, 커피, 코코아, 실내 가구에 대한 부분은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고려, 조선 시대의 가구, 의복, 밥, 음료 등과 같이 일상을 구성하는 소소해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가 궁금하다. 우리나라 역사학은 큰 사건 중심의 서술에 집중하는 것 같고 아날학파 식의 역사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페르낭 브로델이 [물질문명, 경제와 자본주의: 15세기-18세기]가 3권으로 출간될 것이고, 각각 "일상생활의 구조(Les structures du quotidien0", "교환의 게임(Les jeux de l'échange)", 그리고 "세계의 시간(le temps du monde)"이라는 부제가 붙을 것임을 예고한다. (그런데 번역서에는 "교환의 세계"라고 되어 있는데 오류일까? 원서가 없어서 확인할 수 없다.)

 

노트>

머리말>

1973-74년의 위기의 결과로 인한 경제 불황의 과정에서 비록 근대적인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비시장경제가 번성했다: 거의 적나라한 물물교환, 용역의 직접교환, 소위"암거래노동",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가사노동이나 집에서 직접 하는 허드렛일 등이 그것이었다. 시장의 밑에서 혹은 시장과 동떨어져서 행해지는 이러한 활동의 층은 몇몇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적어도 GNP의 30-40퍼센트를 차지하면서도 모든 통계에서 빠져 있었으며, 심지어 공업화된 국가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의 가사노동이 시장경제 속에서 빠져 있는 것은 21세기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상의 가사노동 역시 경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비시장경제인 것뿐.

 

서론>

도처에 편재하고 침투하며 반복되는 이 물질생활은 일상사(Routine)라는 성격을 띤다. (...) 물론 이 물질문명이 어디에서 끝나고, 섬세하고 민활한 시장경제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정확히 지시하기는 아주 힘들다. 물질문명과 시장경제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경제문명이 공존, 상호교란, 모순되기도 함을 이야기한다. 

 

일상성이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겨우 표시가 날까말까한 일이다. 관찰공간을 좁힐수록 물질 생활의 배경 그 자체 속으로 들어갈 기회가 더 커니다. 큰 단위는 일반적으로 큰 역사에 해당한다. 즉 원거리무역, 국가경제나 도시경제의 망 등이 그것이다.(...) 잡보면의 일상사는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일반성 혹은 구조가 된다. 그것은 사회의 각 층에 침투하여 영구히 반복되는 존재양식, 행동양식을 특징짓는다. 

 

다양한 층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입고 거주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흥미 없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포착한 스냅 사진들은 여러 사회의 대조점, 상이점을 확인시켜주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피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흥미 있는 놀이이다. 

 

제1장 수의 무게>

18세기 말까지도 아직 원시적인 동물의 세계가 광대한 공간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 천국의 한가운데에 인간이 나타난 것이 새로운 비극이었다. ('참조를 위한 척도' 중)

->오늘날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은 인간 때문에 자신들의 서식처를 잃어가고 있고 멸종되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18세기 말까지는 아직 다른 동물세계에 미친 인간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다면, 인간이 지구환경의 파괴와 다른 생명체의 멸종을 야기한 시간이 불과 2세기가 조금 넘는 정도라니... 

 

사실 여러 종류의 상이한 바이러스가 존재하며, 오늘날 백신이 큰 효과가 없는 것도 이 불안정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변이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신은 거의 언제나 유행하는 인플루엔자에 뒤쳐진다. 그 결과 일부 실험실에서는 병보다 앞서가기 위해서 유행중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가지고 시험관내에서 몇 차례 변이를 일으키게 하고는 하나의 백신 속에 앞으로 닥칠 인플루엔자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은 여러 종류의 변이체를 포함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아마도 유난히 불안정한 종류인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많은 병원체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되어가는 것이 아닐까?('18세기에 마무리된 생물학적 앙시앙 레짐' 중)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바이러스의 경우에도 그 변이능력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19를 따라잡기가 역부족일 수 있다.

 

인간은 적어도 두 전선에서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는 식량부족에 대한 것-이것은 거시 기생의 측면이다- 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노리고 있는 많은 교활한 질병에 대한 것이다. 이 이중의 차원에서 앙시앵 레짐 시기의 사람들은 늘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세기 이전에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아주 짧았으며 부유한 사람들의 경우도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몇년 더 길 뿐이었다.('18세기에 마무리된 생물학적 앙시앙 레짐' 중)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시기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식량과 질병은 인류생존과 밀접하다. 과거보다는 상황이 좀더 나아졌을 수 있지만 여전히 식량과 질병의 문제는 지구적 차원에서 해결된 것은 아니다.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세계적 확산 상황만 보아도 그렇다.

 

문화란 아직 채 성숙하지 않은 단계의 문명이다. 즉 최적 상태에 도착하지 않은, 그래서 성장을 확고히 하지 못한 단계의 문명이다. 그리하여 문명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그리고 이 기다리는 기간은 오랜 동안이 될 수 있다- 이웃 문명으로부터 무수히 착취당하기 쉽다. 이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다수 대 소수' 중)

 

제2장 일상의 양식: 빵>

15-18세기에 사람들이 먹는 기본 음식은 주로 식물성 음식이었다. 이것은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아메리카나 블랙 아프리카에서는 자명한 진리였으며, 벼를 재배하는 아시아 문명권의 경우에는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명백한 사실이다. 극동지방에서 일찍이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된 것도 육식을 아주 조금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단지 칼로리 수치만을 기준으로 하여 경제적 결정을 한다면 똑같은 면적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목축보다 월등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전세계적 차원에서 굶주림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오늘날에도 이 대목은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는가는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그를 둘러싼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 말해준다.

->어떤 사람이 섭취하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 개인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 문화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밀이 도처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유럽의 팽창을 확인해주는 것.('밀' 중)

 

무엇보다도 다양한 품질의 밀들이 존재한다. 프랑스에서는 최상품의 것을 흔히 "la tête du blé(밀의 우두머리)"라고 부른다. 그 외에 중간등급의 것이 있고 또 밀과 다른 곡물, 대개 호밀과 섞어 파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petit blé 또는 méteil"라고 한다. 밀을 재배할 때는 결코 이 한가지만 경작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밀도 대단히 오래된 곡물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오래된 곡물이 늘 그 옆에서 함께 자란다. 낟알에 겨가 들러붙어 있는 밀인 "épeautre"는 14세기까지도 이탈리에서 볼 수 있었고, 알자스, 팔츠, 슈바벤,스위스 고원 등지에서는 1700년 경에도 빵 제조용 곡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헬더란트와 나뮈르 백작령에서는 18세기 말에, 그리고 론 강 계곡에서는 19세기초까지 재배되었다. ('밀' 중)

->그러고 보니 몇 년전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épeautre"빵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이 빵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사먹었었다. 거칠게 보여서였던 것 같다. 지금 한국에서는 아침에 종종 호밀빵을 먹는다. 그런데 사실 과거 프랑스에서는 이런 빵들은 저급한 빵에 속하는 것이었다는데, 오늘날은 건강을 위해 이런 거친 빵을 더 선호하게 된 상황.  

 

여러종류의 곡물을 모두 합해도 빵을 만들 수 있는 곡물은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유럽인들은 만성적인 결핍에 적응해야 했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야채류를 먹든지 혹은 밤이나 메밀로 만드는 유사 밀가루를 먹어야 했다. 메밀은 16세기 이후부터 노르망디 지방이나 브르타뉴 지방에서 재배했는데, 밀을 수확한 이후 심어서 겨울이 오기 전에 수확했다. ('밀' 중)

->오늘날 브르타뉴 지방의 대표음식인 '갈레트'는 메밀가루로 만든 것이다. 식량부족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먹은 메밀이 이제는 특별한 향토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도피네에서 1674-1675년 사이의 겨울동안 "도토리와 식물뿌리"를 먹은 것은 아주 비정상적인 일이었으며 그것은 가공할 만한 기근의 표시였다. ('밀' 중)

->프랑스에서 도토리가 길 위에 나뒹구는 것을 흔히 보게 되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도토리를 먹지 않았다. 도토리는 그야말로 먹을 것이 없는 굶주림의 상황에서나 먹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마이엔이나 라발 근처든지 다른 곳이든지 (로마 근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간에 1-2년 곡물 재배를 위해서 파종했다가 다시 목축을 하는 것은 단지 지력을 회복하는 방법이었을 따름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소위 휴경지는 삼포제의 경우 흔히 그런 것처럼 경작을 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죽은 휴경"과는 거리가 멀다. 이 방식은 자연방목을 하다가 이따금씩 밭갈이를 해주어 초지를 복구시키는 정도만이 아니라 재배하는 방목인 것이다. 예컨대 피니스테르에서는 언제나 장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가시풀(ajonc)을 뿌렸는데, 이것은 생긴 모습과는 달리 분명한 사료작물이었다. ('밀' 중)

->브르타뉴에 가면 곳곳에서 ajonc을 볼 수 있다. 봄이면 노란꽃이 피어 보기가 좋다. 그런데 그것이 예전에 피니스테르 지방에서는 사료로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심었던 것인 줄은 몰랐다. 

 

브르타뉴에서는 물이나 우유에 메밀을 넣고 끓인 진한 죽인 그루(grou)를 자주 먹었다.('밀' 중)

 

파르망티에의 말을 믿는다면, 집에서 빵을 만드는 관행이 프랑스의 "대부분의 큰 도시에서" 사라진 것은 1770-1780년이다. ('밀' 중)

->그러고 보면 프랑스 도시사람 대부분은 집에서 빵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곳곳에 빵집이 있고 사람들은 그 빵집에서 빵을 산다. 예전에 기숙사에 살 때 미국인 친구들은 빵을 만들어서 식사를 했었다. 그리고 독일인 친구들도 가끔을 빵을 구웠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이 빵을 집에서 굽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오늘날 인디언 구역에서 옥수수를 기르며 사는 농민들, 그중에서도 특히 안데스 산맥에서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흔히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란 옥수수를 먹고 또 먹는 가운데 가끔 말린 감자로 보충하는 정도이다.(우리는 감자의 원산지가 페루라는 것을 알고 있다.)('옥수수' 중)

 

제3장 사치품과 일상용품:음식과 음료>

사치란 다만 희귀한 것이나 허영인 정도가 아니라 성공, 사회적 매력, 가난한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하려는 꿈이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도달하는 순간, 이전의 영예는 곧 사라져버린다. (...) 그러므로 부자들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모든 사치는 낡아빠지게 되고 유행은 지나가게 된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는 교훈이다. 그러나 모든 사치는 타고 남은 재에서부터, 그 실패로부터 되살아난다. 사치는 사실 그 어느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사회적 수준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 수준차이는 매번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다.  

 

숟가락과 칼 자체는 꽤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그러나 숟가락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이나 칼을 제공하는 관습이 생긴 것은 16세기에 가서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식사하는 사람 자신이 자기 것을 가지고 같다. 마찬가지로 각자가 자신의 잔을 자기 앞에 놓았다. ('식탁:사치스러운 음식과 대중적 음식' 중)

->우리나라에서 젓가락을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개인별 포크는 대략 16세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베네치아로부터 느리게 퍼져나갔다. 독일의 한 목사가 이 악마 같은 도구를 비난하는 것을 보라. "우리가 이 도구를 쓸 것을 하느님이 원하셨다면 우리에게 왜 손가락을 주셨겠는가?"('식탁:사치스러운 음식과 대중적 음식' 중)

 

핵심적이고 대체가 불가능한 소금은 성스러운 음식이었다. ('식탁:사치스러운 음식과 대중적 음식' 중)

 

"진짜 그뤼에르(véritable gruyère)"라는 스위스 산 치즈는 18세기 이전부터 프랑스에서 대량으로 소비되었다. 1750년 경에는 매년 3만 캥탈 정도를 프랑스로 수출했다. "프랑슈-콩테, 로렌, 사부아 지역에서는 이것을 모방한 위조품을 만들었으며" 그 모조품이 원래의 스위스 치즈와 같은 명성과 값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널리 보급되었다. ('식탁:사치스러운 음식과 대중적 음식' 중)

->프랑스에서 지낼 때 특별히 좋아하던 치즈로는 콩테 치즈가 있었다. 구수한 맛이 나는 익힌 우유로 만든 치즈인 콩테가 사실 스위스 치즈 모방작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 한국에서는 프랑스 치즈 구하기가 힘드니까 마트에서 파는 스위스 그뤼에르 치즈를 가끔 먹곤 한다. 그뤼에르가 콩테란 맛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콩테 치즈가 있었다면 그 치즈를 구입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뤼에르가 콩테의 오리지날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프랑스 치즈가 최고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사실 대구는 사순절 땡 피할 수 없이 먹게 되는 음식이거나, 16세기의 한 작가가 "막일꾼들에게 남겨진 음식"이라고 썼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다. 고래고기와 고래기름 역시 비슷한 경우이며, 이것은 대구보다 더 거칠고(혓바닥고기는 예외인데 이것은 앙브루아즈 파레에 의하면 아주 맛있는 부위라고 한다) 사순절 때에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으로 쓰였다. ('식탁:사치스러운 음식과 대중적 음식' 중)

->대구는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생선인데, 프랑스에서 지낼 때는 대구가 그리 비싸지 않아서 한국에서보다 즐겨 먹었다. 대구가 귀해서 할머니가 작은 아버지가 고향에 내려오면 며칠 전부터 말린 대구를 구워서 내놓고 소주 한 잔 걸쳤던 일이 생각난다. 자다가 깬 내가 곁에서 대구 한 조각을 얻어먹곤 했는데, 그 맛이 무척 좋았었다. 그런데 이 생선이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양식이었다니! 지금은 점차 대구가 귀한 생선이 되고 있다. 남획이 너무 심해서가 아닐까 싶다. 고래고기는 아주 어렸을 때 인천에서 먹었다. 작은 아버지가 인천을 방문한 할머니를 위해 식당에서 대접했었다. 접시 하나에 다양한 색깔의 다양한 맛의 고래고기 조각들이 놓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맛이 독특했던 것 같다. 지금은 고래를 잡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먹을 일이 없다. 지금 나는 모든 생선, 해산물을 될수록이면 적게 먹으려고 노력한다. 

 

18세기에는 파리에서 파는 알콜 혼합음료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세트 지역의 물, 편도를 넣은 크림 과자를 가미한 아니스물, 클레레트 물(이것은 "클레레(Clairet)" 포도주를 제도하는 방식으로 즉 포도주에 향신료를 담가 향취를 강하게 하는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 과일을 기본 원료로 해서 만든 라타피아, 설탕과 럼 주를 기본 원료로 해서 만든 바르바도스 물, 셀러리 물, 프누예트(fenouillette:이것은 회향풀(fenouil)를 가지고 만들었다), 밀-플뢰르(mille-fleur) 물, 카네이션 물, 숭고한 물(eaux divines), 커피 물......이 "물들"을 만드는 대중심지는 랑그도크의 브랜디를 만드는 곳과 가까이 있는 몽펠리에였다. 중요 고객은 물론 파리였다. 위셰트 거리에서는 몽펠리에 상인들이 거대한 창고를 만들어 이곳에서 술집 주인들에게 반도매로 이것을 팔았다. 16세기에 사치품이었던 것이 이제 일상품이 된 것이다.('음료수와 "흥분제"' 중)

->18세기 몽펠리에가 알콜혼합음료의 대생산지였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세계의 혁신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던 유럽은 증류주의 발견과 거의 같은 때에 자극제이며 강장제의 성격을 가지는 세 가지의 새로운 음료를 발견했다: 코코아, 차, 커피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해외에서 들어온 것이다. 커피는 아라비아(원래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이지만 그 다음에 아라비아로 들어갔다), 차는 중국, 코코아는 멕시코에서 들어왔다.('음료수와 "흥분제"' 중)

->나는 지금껏 코코아는 아프리카가, 커피는 남미가 원산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 커피의 고향이 에티오피아라구나. 에티오피아의 시다모 커피가 떠올랐다. 코코아는 겨울에 특별히 좋아하는 음료인데, 지금은 마시지 않는다. 설탕이 들어 있지 않은 유기농 코코아를 구하기 어려워서였다. 그런데 아동을 노예노동에 동원해서 카카오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공정무역의 코코아, 초콜릿이 아니면 구매하지 않기로 해서 코코아도 초콜릿도 모두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공정무역 물품이 아니면 먹지 않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사치품이었던 커피, 차, 코코아가 대중화되려면 단가가 싸져야 할테니 불공정한 노동착취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커피, 차, 코코아를 마시지 않으면 되겠지만... 차는 포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유기농으로 생산되는 차만 이용하는 정도에서 타협하고 있다.

 

 1768년 파리에서 유행하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명사들은 코코아를 가끔 마시고 늙은이들은 자주 마시며 일반 사람들은 결코 마시지 않는다." 코코아가 성공을 거둔 유일한 곳은 스페인이다.('음료수와 "흥분제"' 중)

 

는 중국에서 10-12세기 이전부터 크게 보급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포르투갈 인, 네덜란드 인, 영국인과 함께 머나먼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은 멀고 험한 수송이었을리라. 이것을 위해서는 찻잎, 다기, 도자기로 만든 찻잔뿐 아니라 이 이국적인 취향 자체-유럽인들이 이 차의 취향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차가 널리 보급되어 있는 인도에서였다.-까지 수입해야 했다. 차를 화물로 처음 유럽에 가지고 온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주도하여 암스테르담에 1610년경에 들어온 것이 처음일 것이다.('음료수와 "흥분제"' 중)

 

서유럽의 일부 협소한 부분인 네덜란드와 영국만이 이 새 음료에 열중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프랑스는 자신이 취급하는 차 중에서 기껏해야 1/10정도만을 소비했다.('음료수와 "흥분제"' 중)

->영국인이 차를 가장 선호하게 된 데는 인도를 식민지화한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서유럽의 차에 관한 이 장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유럽은 오랫동안 차의 재배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차나무를 자바에 심은 것은 1827년에 가서의 일이며, 실론에 심게 된 것은 1877년으로서, 이 섬의 커피나무를 모두 망쳐버린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음료수와 "흥분제"' 중)

->신 맛이 나는 실론티, 이 실론티의 탄생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이니까. 

 

이슬람권에서도 차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모로코에서는 설탕을 많이 친 박하향의 차가 국민적인 음료가 되었지만, 사실 이것은 18세기 영국의 중개에 의해서 들어온 것이었다. 그것이 크게 보급된 것은 그 다음 세기의 일이다. ('음료수와 "흥분제"' 중)

->내가 몽펠리에에서 살았을 때, 월세방을 빌렸었다. 2층집에 6명의 세입자(프랑스인 젊은 남자 셋, 알제리 여성과 모로코 남성, 그리고 나)가 세들어 부엌을 공유하며 살았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으면 모로코 아저씨가 내게 꼭 민트티 한 잔을 건네주셨다. 프랑스어에 서툰 일용직 노동자인 아저씨는 미소지으며 차를 건네는 것이 모두였다. 그 민트티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하고 민트향이 강한 차였다. 아저씨는 매일 이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말이면 아랍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에 들러 싱싱한 민트를 사오곤 하셨다. 이때만 해도 민트티가 모로코의 국민음료인 줄 알지 못했다. 다만 아저씨의 친절이 고마웠을 뿐. 아무튼 아랍인들이 즐겨찾는 장터는 언제나 민트향이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선전(커피는 성욕을 억제하는 "환관들의 음료"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와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파리에서 많이 보급되었다. 17세기말에는 커피행상이 등장했다. 이들은 터키인 복장을 하고 터반을 두른 아르메니아 인들이었는데 끈을 두른 광주리에 커피 제조기, 화로, 잔들을 담아가지고 다녔다. 하타리운이라는 아르메니아 인은 파스칼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1672년 커피를 파는 가게를 최초로 열었다. 이 가게는 생-제르맹 시장에 있는 여러 가게 중의 하나였다. ('음료수와 "흥분제"' 중)

->커피 행상이라니... 상상만 해도 재미있다. 지금도 프랑스에는 어딜가나 '카페'가 있다. 프랑스인들이 그 어떤 음료보다 커피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해보인다. 

 

이것(18세기 파리에 있는 카페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한 약도)에 의하면, 이 시기(17세기말)에 파리에는 700-800개의 카페가 있었다.  ('음료수와 "흥분제"' 중)

 

품질과 가격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언제나 모카 커피였고 그 다음이 자바 커피와 부르봉 섬의 커피였으며(부르봉 섬 커피 역시 품질이 훌륭해서 "자바 커피처럼 커피 알이 작고 푸르스름하다."), 그 다음 것들로 마르티니크, 과달루페 커피가 있었고 산토 도밍고 것이 최하였다. ('음료수와 "흥분제"' 중)

->커피혁명을 빼놓고 18세기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페르낭 브로델의 의견. 

 

후추는 시초부터 인도라는 문명을 뒷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차는 중국, 커피는 이슬람권을 배경으로 했으며, 심지어 코코아의 경우도 뉴-스페인에서 고급 문화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담배는 아메리카의 "원시인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 영국에서 담배가 유달리 빠르게 보급 된 것은 극빈농 사이에서였다. ('음료수와 "흥분제"' 중)

 

18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담배를 피웠다. 남자나 여자 가릴 것 없이, 관리나 가난에 찌든 사람이나 모두 피웠으며, "심지어 삼척동자까지도 피웠다. 얼마나 풍속이 빨리 바뀌는지!"하고 절강성의 한 문인은 탄식했다. 마찬가지 현상이 1688년 조선에서도 일어났다. 이곳에는 1620년경에 일본을 통해 담배가 도입되었다.  ('음료수와 "흥분제"' 중)

->17세기초 조선에 담배가 보급되서 17세기말에 담배가 대중화되었다는 이야기. 

 

제4장 사치와 일상용품: 주택, 의복 그리고 유행>

일반적으로 더 높이 올라갈수록 세들어 사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하락했다. 7층이나 8층의 다락방, 창고방에는 극빈자가 주소를 정했다. (...)

어디를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네덜란드의 도시들이나 심지어는 암스테르담에서도 가난한 자들은 낮은 집, 지하방에 살았다. ('전세계의 주택들' 중)

->지금 우리나라도 가난한 사람들은 옥탑방이나 반지방에 산다.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18세기에 시작된 사치 중 결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부자들의 경우 집과 일터가 분리된 것이다.  ('음료수와 "흥분제"' 중)

 

서유럽에서도 시골이나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완벽한 궁핍 속에서 살았다. 그들은 18세기 이전에는 가구가 아예 없거나 거의 없었다. 18세기 들어서야 기본적인 일용품이 퍼지기 시작했다. ('실내' 중)

->우리나라의 가구사도 궁금하다. 가난한 도시인들이 가구를 구비하고 살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리고 구비하기 시작한 초창기 가구는 무엇이었을까? 유럽의 보통사람들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의자, 침대, 매트리스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6세기까지 혹은 때때로 그 이후까지 있었던 가장 낯선 옛 관습은 1층과 각 방의 바닥을 겨울에는 짚으로, 여름에는 싱싱한 풀과 꽃으로 덮는 일이다. ('실내' 중)

->친구의 외할아버지는 방바닥을 덮기 위해 짚으로 돗자리를 짜서 덮었다고 했다. 그때가 20세기 중반. 우리나라의 20세기 중반에도 장판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유럽의 경우 16세기경에 바닥에 짚을 깔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미 장판으로 바닥을 덮고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런 사실들이 아주 원시시대의 일인 마냥 낯설기만 하다. 여름에는 꽃과 풀로 바닥을 덮었다니 참으로 신기하다. 

 

기름이나 풀칠을 하여 벽 위에 꽃, 나뭇가지, 등꽃을 덮어 장식하던 것은 태피스트리에 자리를 내주었다. ('실내' 중)

->프랑스에서 태피스트리를 전시한 모습을 볼 기회가 많았다. 태피스트리는 한기를 막기 위해 벽에다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 태피스트리가 탄생하기 전에는 꽃과 나뭇가지 등으로 벽을 덮었다니!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진짜 투명한 창유리가 등장한 것은 16세기가 가서이다. 그리고 나서도 그것이 보급되는 것은 불규칙했다. 그것이 빨리 보급되었던 영국에서는 1560년대부터 농민들 집에까지 퍼졌는데, 그것은 영국 농촌이 급속히 부유해졌고 유리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 1779년에만 해도 파리에서는 최하층 노동자의 방도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밝았던 데 비해 리옹에서는 다른 일부 지방에서처럼 여전히 기름종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 세르비아에서는 19세기에 가서야 창에 유리가 보편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베오그라드에서는 1808년에도 아직 유리가 희귀했다. ('실내' 중)

->며칠 전 큰 테이블 유리와 커다란 액자 유리를 버렸다. 각각 2천원씩 버리는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인류사에서 유리가 귀한 사치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유리가 등장한 것도, 게다가 큰 유리가 등장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유리가 얼마나 귀했으면 유리로 만든 그릇, 컵 등이 사치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건물 외벽을 통유리로 마감을 하기도 한다. 아파트만 해도 큰 유리창이 벽을 대신하고 있다. 유리가 너무 흔하다. 유리의 품질도 강화유리, 내열유리 등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엄격한 의미에서 유행은 17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이제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의 의미로 유행을 쫓아갔다. 그때까지 사물들은 그렇게 빨리 변화하지 않았었다. ('의상과 유행' 중)

->유행이 가능하려면 물질문명의 발전이 우선되야 할 것이다. 물건이 충분히 흔해야만 가능하다. 물건이 넘쳐나는 요즘처럼 물건들이 쉽게 구매되고 버려질 수 있을 때 유행이 힘을 발휘한다. 

 

중요한 것은 1350년경에 남자옷을 단번에 줄여버린 것으로서 현인, 노인, 또 전통 수호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대단히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기욤 드 낭지의 한 계승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해쯤에 남자들, 특히 귀족, 시종과 수행원, 몇몇 부르주아 및 그들의 하인들이 너무 짧고 너무 좁은 옷을 입어서 가려야 할 곳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몸에 꼭 끼는 의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사람들은 결코 긴 의상을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여자들의 블라우스 역시 몸에 꼭 끼게 되었고 몸의 굴곡이 드러나며 가슴부분이 크게 패이게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이었다.('의상과 유행' 중)

->20세기에도 속옷을 겉옷처럼 입는 것이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옷차림에 놀라지 않는다. 남자들이 스키니진을 입게 되었을 때 다들 동성애자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녀노소 스키니진을 넘어 스타킹처럼 밀착된, 속옷처럼 보이는 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유행은 이전에 허용하지 않았던 것들을 대중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사치가 한 경제를 지탱해가고 진보시키는 좋은 수단을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한 사회를 부양하고 매혹시키는 수단이다. 결국 상품과 상징과 환각과 환상과 지적 사고들의 이상한 조합인 문명이라는 것이 이 게임을 주도하게 된다......간단히 말하여 물질생활의 심층에까지 까탈스럽게 복잡한 질서가 형성되며 여기에 경제, 사회, 문명이 가지는 함의, 경향, 무의식적 압력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의상과 유행' 중)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읽다 보니, 우리 일상사 속에서 의식주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가 정말 궁금해졌다. 그와 관련한 역사서가 있는지 한번 살펴봐야겠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읽으면서 프랑스의 의식주와 관련한 대목은 프랑스에서 경험했던 생활 때문에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의 일상사가 장구한 역사 속에서 변화를 거쳐 자리잡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