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외로운 도시], 뉴욕예술가들의 고독 들여다 보기

Livcha 2021. 7. 20. 11:57

영국의 작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올리비아 랭(Olivia Laing, 1977-)의 [외로운 도시(The lonely city, 2016)]는 어크로스 출판사에서 김병화에 의해 2017년에 번역출간되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시립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놓고 한참동안 읽지 못하다가 뒤늦게 완독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독에 관한 책이려니 했는데 읽다보니까 뉴욕이란 도시에서 살아간 예술가의 고립, 고독, 소외에 대한 책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예술가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m 1882-1967),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데이비드 워나로위츠(David Wojnarowicz, 1954-1992), 헨리 다거(Henry Darger, 1892-1973), 클라우스 노미(Klaus Nomi, 1944-1983) 등이 있다. 나로서는 에드워드 호퍼, 앤디 워홀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예술가들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동안 느꼈을 고독감은 에이즈라는 질병, 어린시절에 받은 학대의 트라우마, 정신병, 가난, 급진성과 같은 이유들이 하나 또는 여럿이 뒤섞여서 생겨났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슬픔, 우울감에 사로잡히다가 급기야 어떤 강렬한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들이 고독, 고립, 소외감을 딛고 행한 예술작업 때문인 것 같다. 예술활동이 고독을 치유하지는 않았지만 예술활동은 분명 고독에서 나오는 것 같다.

 

노트-이어지는 생각>

 

2. 유리벽

고독을 고백하는 사람은 곧 타인들로 하여금 몸을 돌리고 달아나게 만드는 금기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제1 인물의 고독이 밖으로 표출될 때 주위에 불안을 조성하는 성향 때문에 제2 인물의 공감능력이 저하될 수도 있다."(프리다 프롬-라이히만의 말)

->흥미로운 이야기다.

 

고독은 혈압을 올리고 노화를 재촉하며 면역체계를 약화하고 인지력의 쇠퇴를 알리는 전조 구실을 한다. 2010년의 어느 연구에 따르면 고독은 질병과 사망률의 증가를 예고하는데, 이는 고독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을 품위있게 표현한 것이다.

->나는 체험적으로 고독이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신체를 얼마나 고통으로 몰아넣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마음과 신체의 고통이 병이 되고 그 병으로 인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공감한다.

 

모델로서는 좋지만 라이벌로서는 안 된다. 조의 경력이 와해된 또 다른 이유는 남편인 호퍼가 그녀의 경력이 쌓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여성작가라서 그런지, 여성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 에드워드 호퍼의 부인 조 호퍼가 예술가로서 성장하지 못한 지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인다.

 

"(...) 아마 무의식이었겠지요. 나는 대도시의 고독을 그리고 있었어요."(호퍼의 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단번에 설명해주는 호퍼 자신의 이야기.

 

3. 그대의 목소리에 내 마음 열리고

특정한 상황에서 외부인이 되고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만족감, 심지어 쾌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고독으로부터 휴식을 얻는, 치유는 아니더라도 휴가 정도는 되는 종류의 고독이 있다.

->여행지에서 외부인이 되고 낯설고 고립되는 경험은 분명 저자가 말하는 휴식이 되기도 한다.

 

자신을 여러명으로 또는 기계로 변신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또한 인간적인 감정, 인간의 욕구, 그러니까 소중히 여겨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필요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이기도 하다. 

->앤디워홀이 '기계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슬프다.

 

기계가 된다는 것은 불편하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있다. 워홀은 인간적 친밀함과 사랑을 대체해줄 이런 카리스마적 대체물을 쓰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무표정함을, 부러워할 만한 초연함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기계가 된다. 기계 뒤에 숨는다. 기계를 인간적 소통과 연결의 동반자나 관리자로 고용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네트워크 속에 숨어서 자신을 보이지 않으면서 타인과 소통하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보다 좀 앞서 사람들은 TV를 통해서 세상을 엿보면서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방법으로 세상과 연결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TV 속 영상을 넘어 더 많은 영상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고 기계 뒤에 숨기가 더 쉬워졌고 더 선호하는 듯하다.

 

군중 속에서 혼자 있기. 동반자를 갈망하면서도 연결되는 데 대해서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다. 실버 팩토리 시절에 워홀이 신데렐라의 혼성어인 드렐라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들 무도회에 갔지만 혼자 부엌에 남겨진 소녀 이름과 다른 인간의 생명의 정수를 자양분으로 삼는 드라큘라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 그는 항상 사람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특히 그들이 아름답거나 유명하거나 힘이 있거나 재치 있거나 하면 더욱 그랬다. 

->군중 속에서 홀로 있다는 것, 즉 타인과 함께 하면서도 적정거리 두며 어울리지 않는 것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태도로 보인다.

 

오해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해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비트겐슈타인을 계속 괴롭혔다.

->오해와 몰이해에 대한 두려움은 없지만 어른이 된 후에 내게 당연한 것이 타인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타인들이 얼마나 나를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진실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4. 그를 사랑할 때

"극장에 앉아서 영화가 돌아가는 걸 지켜보는니 그냥 밖에 나가 걷겠다. 걷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즐거움이다."(그레타 가르보의 말)

나 역시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혼자 걷는 것보다 같이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이 수다를 떨 필요는 없다 나란히 걸을 필요도 없다. 다만 누군가 함께 걷는다는 느낌이 좋다. 하지만 극장이나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는 것은 혼자의 시간을 보낼 때인 것 같다. 꼭 누군가 함께 볼 필요는 없다. 영상 속에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6.세계의 끝, 그 시작점에서

고립되거나 집단 따돌림을 받는 스트레스를 계속 겪다보면 면역기능이 쇠퇴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숨어야 하는 행동, 스티그마가 찍힌 정체성을 은폐해야 하는 사실 또한 스트레스를 주고 소외시키는 일(...)

 

죽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무서운지 고통스러운지 이야기한다. 따뜻한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이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정말 죽음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는 느낌이라면 좋을 것 같다.

 

뭔가 살아 있는 것, 뭔가 살아 있고 아름다운 것이 사회의 메커니즘에, 사회의 기어와 철로에 붙잡히고 파괴된다. 내가 에이즈를 생각할 때, 그것으로 죽은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조건을 생각할 때,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애도를 생각할 때, 사라진 사람들을 10년동안이나 가슴에 담고 다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는 데이비드의 꿈(철로에 붙들여 있는, 척추가 부러진 말을 구해주려하지만 할 수 없는  악몽)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테이프를 들으며 옷소매로 눈가를 훔치는 것은 그저 슬픔이나 연민 때문이 아니다. 그건 이 용기 있고 섹시하고 급진적이고 까다롭고 엄청나게 재능 많은 남자가 서른 일곱의 나이로 죽었다는 사실, 이런 종류의 죽음이 대량으로 허용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 권력을 쥐고 있는 어느 누구도 이 기차를 멈추고 그 말을 제때 풀어놓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7.사이버 유령

더 안전한 도시 더 깨끗한 도시, 더 부유한 도시, 갈수록 더 똑같아지는 도시, 삶의 질이라는 화법 뒤에 잠복하고 있는 것은 차이에 대한 깊은 두려움, 더러움과 감염에 대한 두려움, 다른 생활형태의 공존을 허용하기 싫은 마음이다. 이것은 연결의 장소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사는 장소이던 도시가 고립 병동, 끼리끼리 나누어 가두는 수용소를 닮은 장소로 변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의 모습이 비슷해진다는 느낌은 도시의 중심가 상가들을 보면서 받는다. 어디나 비슷한 상점, 체인점이 들어선 도시중심가는 실망감을 넘어 공포심마저 준다. 도시의 힘은 다양성이어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자꾸 비슷해진다. 누구나 비슷한 꿈을 꾸고 비슷하게 생활하고 비슷하게 죽는 도시라는 공간, 우울하다. 안전에 대한 열망이 어떤 점에서 도시를 더 두려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8.이상한 열매

고독의 고통은 은폐와 관련된다. 약점을 숨기도록, 추함을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도록, 흉터가 문자 그대로 역겨운 것일 때 덮어버리도록 강요하는 감정에 관련된다. 그런데 왜 숨기는가? 결핍이, 욕망이, 만족감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 불행을 경험하는 것이 뭐가 그리 수치스러운가? 왜 끊임없이 절정에 머물러야 하는가? 세계 전반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여 둘만의 단위 속에 안락하게 봉인되어야 할 필요가 왜 생기는가?

 

고독이 만드시 누구를 만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스티그마와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임을, 그래서 저항할 수 있고 저항해야 하는 대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고독을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누군가 고독의 지옥에 빠지는 세상에서 서로 연대하고 서로에게 다정하게 대하자고 이야기한다.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대단한 예술작품을 생산하지 못하더라도 고립과 소외의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쪽이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생은 향유하기에도 짧다. 물론 누군가는 인생이 짧아서 예술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