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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어떤 진정한 우정

Livcha 2022. 9. 26. 14:48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책표지

토마스 베른하르트라는 20세기 오스트리아 작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요즘 즐겨 읽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관련서적들을 검토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이 책의 저자가 바로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 이 책은 1982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현암사에서 1997년에 번역출간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토마스 베르하르트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과의 우정을 다루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와 나눈 우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자신은 어떤 점에서 닮았고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 등에 대해서 적었다. 

 

이 책은 1967년 자신이 바움가르트회에의 헤르만 병동에 폐병으로 입원했을 때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루트비히 병동에 정신병으로 입원한 때의 기억에서 시작한다. 자신도 파울 비트겐슈타인도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들이었고 둘다 과대망상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저자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우정을 맺게 된 것은 음악적 관심과 열정 때문이었다. 이들은 함께 모짜르트와 베토벤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저자에 의하면 파울은 두 가지에 미친 듯 열중했는데, 음악과 자동차경주였다고 한다. 

정신적 삶을 위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줘버려 말년에는 가난하게 살았다는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삶은 그의 삼촌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닮아 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주었고, 그래도 남은 재산은 자신의 형제자매에게 줘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어쩌면 유전적인 요인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그의 세 형제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우울과 광기도 유전적 요인으로 보인다. 아무튼 비트겐슈타인가의 사람들은 파울을 싫어했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욕했다고 하는 대목에 눈길이 갔다. 아마도 둘은 너무 닮았지만 다른 비트겐슈타인가 사람들은 이들에 비해 너무 세속적이고 안정적인 물질적 삶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자신이 산책과 자연을 싫어하고 도시에 살 타입으로 이야기하면서 파울 역시 도시에 살 타입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시골에서는 결코 정신이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시골에서는 사고가 위축된다고 여겼다. 둘은 도시의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사람을 관찰하며 헐뜯는 것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런 행위는 둘다 사람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즐거울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저자와 파울의 정신세계는 닮아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파울은 저자를 '내 정신의 동반자'라고, 저자는 파울을 '진정한 친구',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그 자체로는 사실 불행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시간이 너무도 힘겨웠던 나의 삶을 그(파울)는 그토록 자주, 그토록 크게 행복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나의 절망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파울이 나타났다." "얼마나 많은 애를 써서 얻어낸 우정" 저자는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카페를 찾아가는 불치의 병'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문인카페를 찾았을 즈음, 다행히 파울을 만나 '가증스러운 빈의 문인세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저자는 파울에게 죽음이 임박해왔을 때 그가 무서워 피했고 그가 죽은 다음에도 그의 묘지를 찾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토록 친했던 친구였지만 그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는 오히려 도망을 간 저자의 태도가 무척 흥미로왔다. 어쩌면 그 만큼 파울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의 죽음을, 그의 죽어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사실은 죽어가는 동안) 그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자신의 삶을 연장했다는 자각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는지... 

 

토마스 베른하르트 사진과 이력

 

 

 

노트>

"가끔씩 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가지 않으려 하는지, 왜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려 하지 않는지 묻곤 했다."

"파울이 자꾸 되풀이하여 자기 자신과 세상을 오래 견뎌 내지 못했듯이 나 역시나 자신과 세상을 못 견뎌했으며, 파울이 정신병원에서 그랬듯이 나도 폐병원에서 다시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왔다."

"그에게는 미치광이들이 삶과 실존에 대해 결정적으로 가르쳐 주었으며, 내게는 폐병 환자들이 파울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으로 삶과 실존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파울은 광기만 지니고 있었고 있었고 이 광기를 기반으로 존재했지만 나는 이 광기에 덧붙여 폐병까지 걸려 있었으며 광기와 폐병, 이 둘을 똑같이 이용했다."

"파울은 사실 삼촌 루트비히만큼이나 철학적이었고 반대로 철학적인 루트비히는 조카 파울만큼이나 미치광이였다.루트비히는 그의 철학으로 유명해졌고 파울은 그의 광기로 유명해졌다. (...) 두 사람의 두뇌는 모두 너무도 비상하였지만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알렸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내 식에 맞게 이야기를 나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함께 하나의 주제에 대해 무엇이든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예기할 ㅅㅜ 있고 또 그 주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철학자는 그가 철학적으로 생각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아도 철학자이다."

"시골에서는 결코 정신이 발전할 수 없다. 오직 대도시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모두 대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간다. 그건 사실 그들이 대도시에서 당연히 철저하게 요구되는 머리를 쓰기에는 너무 게으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만큼 더 노쇄해져 날이면 날마다 온갖 이상한 재주를 부리며 -이러한 병적인 모험이 아니더라도 우리 두뇌는 이미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혹사당하고 있다- 견딜 만한 상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런 견딜 만한 상태에서 우리는 그래도 가끔, 그러지 않으면 완전히 포기해야 하므로, 우리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많은 것을 준 사람들, 거기다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의미했고 정말 모든 것이기도 했던 서너 사람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우리는 동시에 이 몇몇 사람이 물론 얼마전 혹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지금 내게는 일월의 추위와 공허를 이겨 내는 데 필요한 사람이 한 명도 살아 있지 않다. 그래서 적어도 이 죽은 사람들과 함께 일월의 추위와 공허를 이겨 나가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저자가 51세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가 좋아했던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 놀랍다. 그가 '삶의 사람'이라고 했던 사람도, 파울 비트겐슈타인도 그보다 한참 연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었던 것 같다. 전자는 40살 정도, 후자도 20살 이상은 연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나는 내가 금방 떠난 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가장 행복한 여행자이고 가장 행복한 움직이는 사람미여 가장 행복한 차 타는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차를 타고 떠나는 사람이며 그 누구보다 불행한 도착하는 사람이다.물론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어떤 병적인 상태이다."

"우리 같은 인간은 그 무엇도 이른바 우연하게나 부주의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짜서 생각한 기하학적이고 대칭적이며 수학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그에게서 세는 병과 아울러 모도블록을 그냥 생각 없이 내디디는 게 아니라 정확한 체계에 따라 내디디는 습관 두 가지를 다 처음부터 파악했다."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들을 회피한다."

"나는 파울을 그가 아주 분명하게 죽어 가기 시작하던 바로 그 때 만났었고, 이 메모가 증명하듯이 나는 그가 죽어 가는 것을 십이 년 이상 보아왔다.(...) 나는 십이 년 동안 죽어가는 친구로부터 살아 남는 데 필요한 힘의 대부분을 얻어 냈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우정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 책이었고 충분히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저자가 고독, 광기, 질병, 죽음에 대한 소재에 집중한 작가였다는 것을 이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독, 광기, 질병, 죽음은 독자인 나도 관심있는 주제라서 이 책이 무척 흥미로왔다. 비록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처럼 책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만나 그의 책을 통해 자신을 남겼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처럼 지속적으로 기억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