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악의 평범성] 허무와 우울 가득한 시

Livcha 2023. 2. 7. 10:43

[악의 평범성] 시집 표지

이산하 시인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1987년 3월 [녹두비평]을 발표했다가 1년 6개월 옥살이를 한다. 이후 시인은 10년동안 절필했다고 한다. 제주 4.3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던 시기에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고통받아야했던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시인이 창작과비평사에 2021년에 발표한 시집이다. 한 때 필화사건을 겪은 시인이기도 했고 이제 60대에 들어선 시인이 어떤 시를 쓰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떠올리게 한 책 제목인 '악의 평범성'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시인 소개

시집 안 시인의 사진이 그의 삶의 골곡을 느끼게 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힘들었구나, 싶었다. 

시는 지극히 허무의 냄새를 풍겼다. 생과사의 갈림길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시신, 사형수 등의 소재는 죽음의 냄새를 풀풀 풍겼다. 

 

"어차피 마음밖에 건널 수 없는 강

그 너머 또다른 무엇이 존재할지 몰라도

결코 지금의 여기보다 더 허무할 수는 없겠지."('어린 여우' 중)

 

시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 표현들, '백척간두', '두 번 다리를 꺾는 백조', '물방울', '물이 들어가는 논', '동백' 등이 시인에게 달라붙어 있는 고문과 테러 등의 트라우마 때문에 삐걱거리는 시인의 심리상태를 전해왔다. 시들은 시인의 고통과 우울의 소리로 들렸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시인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시인에게 [한라산]은 훈장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그에게 그 시는 오히려 트라우마일 뿐인 것 같다. 그래서 안타깝다. 

시인은 과거의 상흔에 현재의 고통을 얹는다. 현재는 생과 사의 갈림길일 뿐. 시인에게 주어진 미래는 죽음 이외는 없는 듯 느낀다. 

그의 시는 한 사람 인생이 고통 이외는 없는 듯 이야기한다. 

 

나는 '강'이라는 시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강은 시인 자신이며, 현재 시인이 느끼는 고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모난 돌과 바위에

부딪혀 다치는 것보다

같은 물에 생채기 

나는 게 더 두려워

강물은 저토록

돌고 도는 것이다.

 

바다에 처음 닿는

강물의 속살처럼 긴장하며

나는 그토록

아프고 아픈 것이다."

 

과거의 고통도 힘들지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깨달음 '살아남은 자의 죄'에서 오는 죄책감, '스타괴물'에 대한 자각. '갇힌 촛불'이 안겨주는 슬픔은 현재의 고통을 만든다. 그가 보지 못하는, 아니 보려하지 않는, 어쩌면 볼 수 없는 우리 삶의 또 다른 모습은 시인의 시 속에 없다. 그는 영영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다. 시인은 이미 고통의 습관에 젖어 있는 듯하다. 시인을 이렇게 만든 것에는 시대의 책임이 있긴 하지만 시인의 몫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정녕 죽음 만이 시인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