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감성

[논바이너리 마더] 아이를 낳은 논바이너리 트랜스맨의 이야기

Livcha 2023. 7. 26. 10:20

[논바이너리 마더] 책표지

책 제목 때문에 이 책을 빌려왔다. 

오늘날 세분된 성정체성에 '논바이너리(non-binary)'라는 범주가 있다는 것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논바이너리'라는 단어에서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논바이너리'로 규정한다는 것은 기존의 성별이분법, 즉 남성과 여성으로의 구분법을 거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식의 젠더이분법을 거부하는 개념에는 젠더리스(genderless), 에이젠더(a-gender)와 같은 개념도 있다. '젠더리스'는 성별정체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고, '에이젠더'는 젠더 없음을 성별정체성으로 인정한다. 말장난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젠더구분에 대한 거부감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논바이너리'에는 '안드로진', '바이젠더', '뉴트로이스', '퀘스처닝'이 있다. 저자 크리스처는 자신을 '안드로진'으로 명명한다. 

'안드로진'은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젠더, '바이젠더'는 남성과 여성의 분리된 젠더인데, 젠더는 상황에 따라 전환한다.  

'뉴트로이스'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여성이나 남성으로 규정할 수 없고 제3의 성으로 보는 경우다. 

'퀘스처닝'은 자신의 성별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을 정체화하지 않거나 못해서 의문을 갖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이토록 복잡한 성정체성 구분이 시도된 까닭이 무엇일까?

기존의 개념으로 성정체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개념이 탄생하는 데에는 우리 사회가 남녀 이분화를 강요하고 그 속에서 각각의 젠더역할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 강제함으로써 남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배제시키거나 소외시키거나 무화시키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사회가 좀더 성숙하려면  젠더구분과 성역할에 대한 유연한 인식이 필요하고 제도적으로도 변화가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 즉 논바이너리 트랜스맨, 안드로진으로 자신을 규정한 크리스의 생각, 느낌과 경험을 담은 이 책은 우리에게 성별구분과 성역할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사색으로 이끈다. 

 

저자 이력

크리스는 생물학적 성별(지정 성별)은 성별이지만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안드로진으로, 트랜스맨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트랜스맨으로 규정한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의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를 양육한다. 

여성 파트너와 함께 가정을 이루어 세 명의 자녀를 둔 아빠로서의 삶을 수행한다. 

 

주변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경우로 보여진다. 

 

이 책을 펼치면서 나는 저자가 자신을 트랜스맨으로 성정체화하면서도 출산을 결정한 이유가 궁금했다. 

또 자신을 논바이너리 안드로진이라고 규정하면서도 트랜스맨으로도 규정하는 이유 역시도 알고 싶었다. 

성정체성 규정이 안드로진에서 트랜스맨으로 이행된 것일까?

출산은 안드로진인 상태에서 결정되고 이후 트랜스맨으로 성정체화한 것일까?

아무튼 크리스는 어린시절, 청소년시절 여성이라는 지정 성별에 대한 거부감이 분명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거부감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기에 1년동안 월경이 중단되는 거식증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크리스에게 기존 여성 성역할을 강요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회였다면 고통스러운 성정체화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진화생물학자의 말처럼 소외 성기, 체모량, 근육량 등 남성적 신체를 결정하는 Y염색체 내 유전자가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동일한 남성을 생산하는 것을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규정한 이상적 남성성에 해당하는 남성은 극히 소수이며 실제로 더 다양한 남성으로 태어나고 성장한다. 소위 여성적인 남성도 있다. 반대로 여성 역시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에 일치하는 여성은 소수다. 남성적인 여성도 있다. 생물학적 성별인 여성과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성역할에 부합하기 위해 부단한 자기살깎기를 평생동안 한다. 이때  여성적인 남성과 남성적인 여성들은 성역할 수행에 거부감과 불편함이 동반된다.

인간 개체는 생물학적인 유전와 더불어 환경과 문화에 의해 자신을 정체화하는데, 이때  개체의 자기정체화는 단순하지 않다. 기존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수행하기 싫은 사람은 자신의 젠더를 없음으로, 때로는 주어진 성역할을 거부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신체적 변형, 각각의 성을 특징짓는 신체를  얻기 위해 신체 일부를 제거하거나 만들거나 하는 (때로는 목숨을 건) 극단적이고 모험적인 과정도 불사한다. 

 

<노트>

 

<종이 위에 남은 말들>

 

-"내가 더는 네 여자 친구가 아니게 되면 나는 그저 네 남자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이의 존재이고 의식적으로 사이에 머무른다. 나는 네 파트너이지만 글세, 사람들은 파트너라고 하면 그저 우리가 레즈비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나? 나는 네 연인이지만 우리 또래 사람들은 그 단어를 진지한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네 아내였던 적도, 남편이었던 적도 없다. 내 어머니가 제대로 된 대명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마다 너는 이렇게 조언한다. 그냥 그의 이름을 많이 부르세요. 저도 그렇게 하거든요." 

('5. Degenderize')

(트랜스맨이나 트랜스우먼이란 단어가 말하듯, 기존 성역할이나 성별 이분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명칭은 자신이 수행할 수 없는, 수행하길 원치 않는 성역할을 벗어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젠더 및 성역할을 기존 사회 속에서 다시 찾아 수행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하지만 많은 퀴어들은 자신이 의식하건 못하건 기존 성별 이분법과 성역할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사회가 말하는 성별구분이나 성역할로 자신의 성정체화를 담을 수 없다는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너는 그저 키가 작고 말도 안 되게 어려 보이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말하면 된다는 소리다. 네 아버지는 내가 나를 그라고 불러 달라고 한 뒤부터 다시는 나를 포옹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가 좋으면 그냥 남자를 좋아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8. FAQ')

(파트너의 아버지의 말은 지독히도 억지소리다.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비틀어서 모욕하는 방식이 놀랍지는 않다. )

 

-"아빠한테서 태어난 애들은 별로 없어요, 그쵸? 샘슨은 번번이 이렇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난 특별한 거죠?"

(크리스가 낳은 아들 샘슨이 과연 자라면서 자신의 부모에 대해 어떻게 인식해나갈지 궁금하다. 성역할과 성이분에 대한 사회의 틀은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에.)

 

-"그 분노는 무엇 때문일까, 그가 나를 해친다면 어떤 방법을 쓸까? 그걸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평생 사람들은 내 겉모습을 혐오했는데, 예전에는 내가 여자처럼 보이지 않는 여자라서였지만 지금은 왜일까?"

(인간은 때로 지독히도 잔인하고 저열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같은 테두리에 속하지 않는 존재를 배제하고 거부하고 무화시키고 협박하고 급기야 제거하는 존재. 

크리스는 자신이고 싶은 대로 살 뿐이지만 주변의 혐오어린 시선으로 협박하는 이웃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야한다. 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차별적 시선에 대해 불안과 공포감을 안고 있다. 다수가 사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데도 두려움과 늘 함께 해야 하는 일상이라니... 안타깝다. 다수의 논리는 여전히 소수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공포의 논리. )

 

-"좋은 트랜스 이웃으로 산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트랜스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보다."

 

<가슴의 역사>

-"내 스포츠브라는 너무 혹사당한 나머지 건조기 안에서 만신창이가 된다. 나는 즙을 있는 대로 짜낸 레몬처럼 충분히 꽉 조인 느낌이 들 때까지 스포츠 브라를 몇 겹씩 겹쳐 입는다."

 

-"가슴 수술은 오래전부터 실행된 수술임에도 마취와 소독술이 발달해 가슴, 림프절과 흉근을 모두 제거하는 급진적 수술법인 할스테드 기술이 도입된 1880년대 전까지는 흔치 않고 실패율이 높았다."

 

<갓난아기를 사진에 담는 법>

-임신을 했지만 전혀 여성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이 몸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단지 생명을 창조하고 빚어낼 수 있는 신체 부위가 달린 그대로였다. 그 생명을 내보내고 돌볼 수 있는 몸. 샘슨을 만들고, 내가 무언가 강인한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그토록 강인한 이름을 붙여 주자 나는 나 자신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침없는 삶>

-"이 마이크로키메리즘microchimerism 세포들은 첫 몇 년간 인간의 몸 속에서 이동하며 손상과 치유를 동시에 일으킨다. (...) 우리 아이들이 몸 밖으로 나간 뒤에도 아이들의 일부는 우리의 몸 속, 우리의 핏속에 살아간다."

 

-"아홉달의 임신, 이 년의 수유. 나는 나를 빼닮은 누군가가 내가 마땅히 가졌어야 할 어린 시절을 보내는 모습을 옆에 서서 지켜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내가 이 소년을 만들고 먹여 길렀다는 사실에. "

 

-"나는 네가 사랑하는 건 내가 벗어나 떠나 버린 나 자신, 샘슨이 내 몸에서 나올 때 빼앗은 부분이라는 것을 안다. (...) 나는 네가 다른 '여자' 때문에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집착한 적은 없지만, 사실은 다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나의 어떤 점으르 네가 그리워할까 걱정하고 있다."

 

-"사진 속의 나를 알아보자 그 애가 눈을 반짝인다. 크리스 엄마는 크리스가 남자인데도 치마를 입게 해주는 사람이라서 멋져요, 그 애가 말한다."

 

-"나와 샘슨 사이는 그 애들과 애들 엄마 사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지어 아이들도 그 사실을 안다. 우리는 샘슨이 자기 성별을 직접 이야기하길 바라며 그 애를 키웠고 그 애는 내가 내 어머니에게 내 성별을 언제 이야기했는지 궁금해한다." 

 

이 책을 읽길 끝내면서 난 샘슨이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했다. 트랜스맨을 아빠로 둔 것도 특별한 일인데, 그 아빠가 자신을 낳았다는 것을 감당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아서다. 어린 샘슨은 자신이 아빠가 낳은 아이라서 특별하기에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처럼 아빠가 아이를 낳은 가정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대목에서는 자신의 특별함이 샘슨에게 어느 정도 부담이 되기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샘슨이 아직 어린 아이지만 그가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치면서 자신의 특별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해나갈까? 

자신의 성별을 직접 이야기하도록 키워진 샘슨은 원피스, 치마를 입고 분홍색을 좋아하는 등 그 어떤 생물학적 남자아이보다 자유롭게 자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샘슨이 만나야 할 사회는 이 아이의 자유로움에 제약을 걸어올 것이다. 크리스가 느끼는 샘슨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일리가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은 최근에 읽은 그 어떤 책보다 심장을 두드리는 강렬한 책이다.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담아서다.  또 저자의 두려움과 불안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다. 

게다가 저자의 경험이 너무 낯설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