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감성

[퀴어, 젠더, 트랜스] 젠더권이란 무엇일까?

Livcha 2023. 8. 6. 15:29

[퀴어, 젠더, 트랜스] 책 표지

리키 윌친스의 [퀴어, 젠더, 트랜스]는 2004년에 'queer theory, gender theory'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이 20년 가까운 긴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다. 

퀴어 이론, 젠더 이론이라고 책 제목을 달기에는 너무 무겁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튼 긴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충분히 탐독할 만한 책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 페미니스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고 아직 성소수자의 존재는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다수 대중에게 오히려 지나치게 급진적인 느낌을 줄 것 같다. 

지은이 리키 윌친스(Riki Wilchins, 1952-)는 젠더 표현과 젠더 정체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젠더권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해온 활동가다. 

 

노트>

1부 모두가 맞물린 젠더 문제

1. 여성의 권리운동

-메시지를 공격하는 데 실패한 보수주의자들은 차선책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공격했다. 이와 비슷한 전략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매도할 뿐만 아니라 '역겨운 페미나치'라고 비난하는 러시 림보(Rush Limbaugh)가 대표적이다.

(혐오하는 자들의 전략에 대한 설명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다. 무엇이든 혐오하고 비난하려고 마음 먹은 자들이 메시지를 무시한 채 어떤 개인을 공격하는 일은 흔하다. 

아... 그리고 러시 림보같은 혐오스런 혐오세력의 한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항상 고맙다.)

 

-페미니즘이 지닌 젠더에 대한 근본 원칙을 만들어냈고 이 원칙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여성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독특한 주장에 여자라는 것과 여성적 특성은 여전히 뒤엉켜 있었다.

 

-우리 각자의 모습, 행동, 옷차림이 성별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인식은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거의 모든 권리 문제를 다루는 시민권운동에서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하나 있다. 내가 기본 젠더primary gender라고 부르는 문제다. 법적인 용어로는 '젠더표현과 젠더 정체성gender expression and identity'이라고 한다.  

 

-양복을 입은 여자와 원피스를 입은 남자는 여전히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저자가 말하듯, 일반 대중들은 대개  위의 여성과 남성을 혐오한다. 나 역시 예외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입을 자유가 있다는 생각은 해도 실제로 양복 입은 여자와 원피스 입은 남자를 대할 때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여성의 남성적인 젠더 표현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레즈비언 분리주의에서 나타났다. 다만, 동시에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이따금 최악의 분리주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남성과 관련된 모든 것에 반사적으로 반감을 표현하고 여자라는 것의 의미를 가장 초보적인 생물학적 결정론에 두는 경향을 보였다. 

 

-몇몇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를 말없이 불편해하는 일은 지금도 드물지 않다. 이들은 트랜스젠더 남성에 대해서는 '남자를 모방함으로써 커뮤니티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해서는 '여자를 모방함으로써 커뮤니티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불편해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는 성역할을 오히려 트랜스젠더들이 지향하고 고착화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 우먼보다 레즈비언 트랜스우먼을 더 불편하게 느끼고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저자는 레즈비언 트랜스우먼이다.)

 

-페미니즘이 남성성, 젠더 표현, 젠더 정체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분명하게 주장하지 않고서 과연 성차별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은 페미니스트가 여전히 마주하는 수 많은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2.동성애자의 권리운동

-[과거] 동성애자운동이 젠더고정관념을 외면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이유:1) 도덕적 이유-현대 동성애자권리운동의 시작은 제 3세계 출신 드랙퀸과 비백인 트랜스 집단이 성소수자 하위문화 공간 스톤월 인에서 이들을 표적으로 삼은 뉴욕 경찰의 계속되는 단속에 맞서 싸웠던 순간. 1969년 당시 부치와 팸 관계속 남성적 레즈비언, 여성적 게이, 트랙퀸은 적대적 이성애자 사회에서 공적 대표자 역할을 해옴. 2) 동성애자의 3명 중 1명은 젠더 규범을 넘어선다. 예를 들어 남성적인 부치, 여성적인 게이

 

-동성애는 그 자체로 여자는 남자와 섹스하고 남자는 여자와 섹스한다는 젠더에 대한 기본적인 규칙을 가장 심각하게 위반한다. 실질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동성애자 권리운동의 활동가들이 젠더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 성적 지향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기란 어렵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미국인은 동성애자의 몇몇 권리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젠더 이분법을 넘어서는 퀴어함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동성애자 권리운동의 활동가들은 동성애자의 정상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에 대응했다. "우리는 이성애자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단지 동성과 섹스할 뿐이죠." 이 전략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잘못된 전제에 기초했을 뿐이다. 

 

-젠더를 권리문제로 만드는 일은 젠더 역할이나 고정관념에 순응하지 않았을 때 어떠한 결과를 마주할지 정하는 권한을 개인에게 준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젠더인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요즘에는 게이인 건 문제가 없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끼순이(여성적 게이)도 상관 없는 건 아니다. 레즈비언은 괜찮지만 티부(남성적 레즈비언)는 곤란하다. 

 

-나는 우리가 젠더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동성애 혐오와 성차별을 진정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 트랜스젠더의 권리운동

-1990년에 들어서자 젠더권을 옹호하는 두 움직임-하나는 트랜스젠더권리운동, 포스트모더니즘(퀴어이론) 부상.

 

-'트랜스젠더'라는 용어와 관련해 1990년대 중반에 생겨난 구분-트랜스 섹슈얼과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은 몸을 바꾸는 자, 즉 호르몬요법, 수술을 동원해서 남성은 여성의 몸으로, 여성은 남성의 몸으로 바꾸는 자. 

트랜스젠더는 의상, 행동, 꾸밈을 통해 젠더표현을 하는 자.

저자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성과 남성의 협소한 젠더 역할에 부딪칠 수 있기에 모든 사람이 트랜스젠더일 수 있다고 본다. /좁은 의미에서 트랜스젠더는 트랜스 섹슈얼, 크로스드레서, 부치와 펨, 트랙퀴과 드랙킹, 여성적 게이, 인터 섹스, 기 센 여성 등을 포함하는 것.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젠더를 성적 지향, 인종, 성별과 같은 타당한 시민권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

 

-트랜스젠더 가운데 침묵하는 다수는 크로스드레서.

(크로스드레서로 보이는 한 여성이 떠오른다. 그녀는 짧은 머리에 남성들의 의상을 즐겨 입었다. 그래서 눈에 띤다.  그런데 이 여성은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명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에게 관심이 많았지만 자신을 동성애자로 표현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깊은 대화를 나눠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과 성지향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내 시선 속에서 그녀는 분명 크로스드레서였다. 저자는 이 크로스드레서를 트랜스젠더로 보는 것이다.)

 

-동성애자 권리운ㄷㅇ의 활동가들이 젠더 위반을 중요하지 않게 다룸으로써 더 큰 정당성을 확보했다면, 트랜스젠더권리 운동의 활동가들은 성적 지향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음으로써 더 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트랜스젠더 집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여전히 의심스러워한다. 

 

-호르몬요법, 수술을 할 생각이 없으면 진짜 트랜스젠더가 아니다? 트랜스젠더 내의 위계 형성.

 

-트랜스젠더 운동은 여느 운동 마찬가지로 내부의 차별 때문에 점점 분열될 위기에  처해 있다. 

 

-퀴어 청소년은 젠더 이분법을 넘어 퀴어하면 무엇이든 트랜스로 본다.

 

(이 파트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 사람은 바로 '트랜스섹슈얼'이었다. 자신을 논바이너리 안드로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트랜스젠더로 표현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님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초에 이미 트랜스젠더 개념을 확장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던 것.)

 

2부 벽을 넘어

4. 데리다와 의미의 정치학

-젠더 이슈가 정치적인 문제로 가시화된 기폭제 두 요인-트랜스젠더운동의 등장과 포스트모던 젠더이론의 출현

-데리다-모더니즘의 종말 선언. 포스트모던 시대로의 들어감을 선언.

-젠더는 언어다. 젠더는 의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체계다. 또한 젠더는 규칙, 특권, 처벌을 수반한다. 어떤 언어를 구사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어떤 상징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규칙, 특권, 처벌이 뒤따른다. 이는 권력과 섹슈얼리티와도 연관된다(남성성과 여성성, 강인함과 취약함, 적극성과 소극젓ㅇ, 우세함과 연약함). 

-우리에게 가장 특별하고 반복되기 어려우며 개인적인 것 중 하나는 몸에 대한 감각이다. 이는 우리가 몸을 어떻게 느끼는지, 젠더에 관한 감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애초부터 젠더를 다루기에 무딘 도구라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는 배제의 과정을 통해서 의자의 전형을 만들어낸다. 이는 처음부터 의자의 의미가 의자가 아닌 것을 모두 제외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젠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자라는 말의 의미를 여자가 아닌 모든 것을 제외하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내고 남자라는 말의 의미를 남자가 아닌 모든 것을 제외하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낸다. 완벽하게 남성적인 것과 완벽하게 여성적인 것을 나타내는 이상적인 전형은 그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배제함으로써 형성된다. 배제된 것 중에는 퀴어한 이들, 차이를 지닌 이들,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지닌 이들, 그러니까 나와 같은 이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남성적인 여성을 모욕적으로 지칭하는 표현보다] 여성적인 남성을 모욕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 더 많다. 양복을 입은 여성보다 원피스를 입은 남성을 더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남성의 젠더 위반은 젠더 정치학을 더욱 심각하게 모독하는 것으로서 훨씬 위협적으로 여겨진다.

-무엇이 실재하는 지를 결정하는 특권을 획득한 언어는 특히 젠더를 냉혹하게 다루어왔다. (...) 우리가 가진 언어 중에서 젠더 규범을 넘어선 것을 가리키는 극소수의 언어는 이를 비난하는 표현뿐이다.-(...) '남자man'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의미의 ]보편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간주된다. [반면] 여자[라는 말의 의미]는 백지상태에 놓이며 신비롭고 이국적이며 알 수 없는 타자의 위치로 밀려난다. 여자에는 남자를 정의하고 남은 의미가 생겨진다. (...) 여자에게 생물학이 운명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생물학 없이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여자는 전적으로 남자로부터 파생된 것이 된다.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 설명된다는 의미에서]결국 여성은 '반대의 성'이 아니라 사실상 파생된 성이고 퀴어한 성이다.

(이 구절을 읽다 보면 바로 기독교의 아담과 이브가 떠오른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태어난 이브란 존재. 아담의 파생적 존재. 서구 언어 성별 지칭 언어는 이 기독교적 사고방식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하자면 이분법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기이한 방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분법은 정치적이다. 이분법은 권력과 관계가 있다. 이분법은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식민 지배자와 원주민과 같은 위계를 구축하고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데리다가 언어, 이성, 의미를 비판한 이유는 그가 타자성과 차이를 질식시키는 서구의 사고방식에 크게 분노했기 때문이다. 

-해체는 정해진 진리가 초월적이지 않다는 것, 진실에 관한 여러 이야기에 기댄다는 것, 그리고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5.푸코와 자기의 정치학

-우리는 [권력이 개인에게 작동하고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개인이 권력의 통로라고 생각하지만 권력은 그보다 앞서 우리를 특정한 종류의 개인으로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저자의 경험: 어릴 때는 평범한 남자아이로 생각->게이(남성동성애자)로 살고자 애씀->트랜스섹슈얼(남자에 몸에 갇힌 여자)이라고 깨달음->스스로 여자로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나를 여자를 모방한다고 해서 고통받음->여자친구가 생김(트랜스섹슈얼 레즈비언). 담론이 달라지면서 결국 트랜스젠더가 됨. 

-부적절한 욕망은 단지 품위를 잃거나 죽음에 이르는 대죄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국가의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며 가만히 두었다가는 확산될지는 모르는 것이 됐다.(...) 비정상적이고 자연스럽지못한 섹슈얼리티는 근절되어야 했다.

(정상성과 일탈이 등장하는 것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무척 흥미롭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이전까지 법, 도덕, 종교의 영역에 있던 성은 의학, 정상성, 질병의 영역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동성애자[라는 범주]의 발명이었다.

-동성애자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이 몇몇 사람을 위한 평등을 실현했을지 모르지만, 수없이 많고 다양한 즐거움이 여전히 질병으로 진단된다는 사실은 동성애의 정치학이 계속해서 많은 사람을 놓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탈적인 존재를 생산하는 구조는 변함없이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6.푸코와 규율사회

-의학/정신의학 담론과 학술/페미니스트담론은 크로스 드레서, 젠더퀴어 어린이, 트랜스섹슈얼, 인터섹스를 표적아로 삼고 이들의 젠더 규범 위반을 병리적인 것으로 규정해왔다. 

-젠더화된 몸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일은 진짜가 무엇인지에 대한 온갖 가정, 젠더의 이분법적인 속성, 정상적인 것의 범주 등을 필요로 함.

-젠더와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담론권력은 특정한 몸, 즐거움, 성을 지닌 특정한 종류의 개인을 생산해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11세에서 12세의 여자아이 중 운동을 하는 이들의 비율은 96%에 이르지만, 6년이 지나 17세에서 18세가 되면 5퍼센트 이하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 같은 경향은 인종이나 경제적 배경이 달라도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얼마 전 조카와 함께 동네 공원에 물놀이를 갔다. 바닥에서 물줄기가 올라오는 곳에서 조카는 즐겁게 뛰어다니면서 물을 맞았다. 조카는 10살인데 이미 자신이 여성임을 정체화한 상태였고 미래의 임신과 출산을 생각하고 있는 평범한 여자아이다. 신기한 것은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가운데 조카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 아이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놀이를 즐기는 남자아이들 뿐만 아니라 남자청소년들은 적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은 초등학생 고학년 이상이 되면 물을 맞으며 뛰어다니지 않구나,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선했다. 불현듯 이 생각이 떠올랐다. 이미 여자아이들은 2차성징이 생겨나는 시점부터 흔히 담론권력이 말하는 여성적임에 부합하는 태도와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할까.)

-감옥은 수감자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어놓기 위해서 설계됐다. 감옥의 목적은 수감자들이 끝없는 감시와 통제 아래에서 언제나 자신을 의식하고 통제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만약 섹스가 몸을 인식하는 이미 젠더화된 방식이라면 어떨까? 섹스가 이미 젠더라면, 그래서 둘 사이의 구분이 전혀 의미가 없다면 어떨까? 원래부터 정해진 것이자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섹스가 해체될 수 있다면 어떨까? 

 

7, 서로 반대되는 섹스라는 말은 가능할까

-섹스는 단지 재생산에 대한 것이거나 적절한 때에 함께 몸을 부대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의 흥미로운 특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는 모든 사람이 지닌 기본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어린이, 청소년, 트랜스섹슈얼, 노인, 완경 이후의 사람, 불임이거나 난임인 사람, 정관절제수술을 받은 사람, 자궁절제수술을 받은 사람, 매우 병약한 사람, 인터섹스 등 현재 생식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앞으로 참여하지 않을 이들도 지닌 특성이라는 것이다. 

섹스는 오로지 재생산에 관련된 것도 유전자, 염색체, 호르몸에 관련된 것도 아니다. 섹스는 골격구조, 적성, 자세, 감정적 기질, 미학적 선호, 체지방, 성적 지향, 성적 반응성, 운동능력, 시회적 지배력, 체형, 체중, 정서적 안정성, 소비 슷ㅂ관, 심리적 기질, 예술적 능력을 설명할 때도 활용된다. 게다가 섹스는 '본능'이라고 불리는 온갖 종류의 것, 예를 들어 둥지 본능, 모성본능, 심지어 특정 브랜드의 맥주만 찾는 본능까지도 설명해준다고 여겨진다.

-유사성의 패러다임에서 살펴보자면 음경과 질을 원초적인 차이의 증거가 아니라 근원적인 내재적인 몸의 유사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도 타당하다.

-라커는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왜 섹스인가? 왜 여러 요소가 모인 이 특별한 집합인가? 왜 이 특별한 조합인가? 왜 우리는 섹스가 모든 몸에, 재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이나 (나처럼) 재생산이 영원히 가능하지 않는 이들의 몸에도 언제나  있기를 원하는가? 

-토마스 라커: '18세기 어느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의미의 섹스가 발명됐다.'

 

8.포스트모더니즘 속의 불만

-한편으로 동성애의 주류화를 비판하는 일은 퀴어함의 가치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도록 이끌었다. 특히 끼순이, 부치와 팸 관계, 트랜스, 드랙퍼포머가 재조명됐다.

-우리는 먼저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는 가부장적 사유를비판하고 자연의 법칙이라는 거짓말을 물리쳐야 한다.

-[젠더 표현과 젠더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가, 때로는 물리적 결과마저 벌어질지 모른다는 위협은 왜 그토록 자주 무기로 선택되는가? 왜 위협과 조롱은 그다지도 효과적으로 작동하는가? 우리는 이에 맞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는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거나 대답을 꺼리는 문제다. 

-자신을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지닌 사람으로 정체화하는 미국인은 21세기에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인종적 소수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생물학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증거를 꾸준히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인종 구분을 뒷받침하는 확고한 과학적 기반이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가 [지구 전체로 봤을 때] 상대적으로 작은 지역인 아프리카에서 살던 같은 (흑인) 집단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섹스도, 인종도 모두 같은 것에서 분화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 같다. 따라서 같은 것에서 차이로 분화된 것을 차별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논리를 펼치는 느낌을 받는다.)

-백인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지닌 미국인을 계속 노예제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백인의 미국은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사람을 흑인으로 간주하는 악명높은 한 방울 규칙을 도입했다.

(그러고 보면 미국 드라마를 보면 백인과 흑인의 부모를 둔 사람을 흑인으로 분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피부색이 백인보다 더 검기 때문에 흑인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흑인차별과 관련한 훨씬 더 정치적 이유가 있을 것도 같다. 흑백혼혈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은데 흑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지나친 감이 든다.)

인종 개념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전혀 없다면, 인종이 적어도 일정 정도는 담론적으로 구성된다면, 인종은 나이, 섹스, 계급, 성적 지향, 젠더와 같은 다른 차원의 문제와 뗄래야 뗄 수 없다. 

-인종과 결부된 젠더고정관념: 아시아계 여성은 초여성적, 수동적, 성적으로 신비로운 존재, 백인 남성은 매력 없고 적극성 부족, 성적 자신감 없는 존재, 흑인 폭력배 남성은 초남성성, 감정적 강인함, 원시적 형태의 이성애와 상대를 압도하는 성적능력의 존재. 100% 이성애자. 아시아계 남성은 얌전하고 유순. 남성성과 성적능력 부재. 타고난 동성애자. 

(미국의 인종과 성별에 따른 젠더고정관념은 낯설면서도 놀랍다.)

-젠더가 성기에 기초하지 않듯이, 특정한 인종이 되는 실천 역시 피부색에 완전히 기초하지 않는다. 

-특권을 누리는 경우에는 특권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특권은 부재를 통해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한결같이 특권을 누렸다면, 당신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세계가 움직이는 평범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제 삼자가 보았을 때는 형제자매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 정작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한 친구가 떠올랐다.)

-비슷한 측면에서 많은 사람은 젠더 고정관념이 일으키는 차별과 폭력이 성인 대부분에게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별과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동기를 지나고 나면 대부분은 결국 젠더 규범에 순응하고 만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확실하게 선을 넘는 순간, 완벽하게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혼란, 경멸, 냉다밍 당연하고 진짜 평범[한 삶]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 말이다.

 

3부 정체성 정치를 넘어

9.인터섹스 어린이와 정체성 정치

-작동하는 담론 권력을 분명하게 인식하려면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몸에 주목해야 한다. 주변부가 주변부인 이유는 담론이 힘을 잃는 곳, 우리가 지닌 어떠한 패러다임도 설명력을 상실하는 곳, 곤란한 예외로 여겨지던 모든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곳이기 때문이다. 

-브라운 대학교의 저명하 ㄴ의학 연구자인 앤 파우스토스털링에 따르면 신생아 2000명 중 1명은 인터섹스다. 

(충격! 생각보다 많다.)

-찰리로 태어난 셰릴(인터섹스)-작은 페니스를 갖고 태어난 아이. 하지만 정소조직과 난소조직을 모든 가진 난소를 가진 아이. ->태어난지 18개월 후 의사들은 찰리가 셰릴이라고 결정. 찰리의 페니스는 비정상적인 클리토리스로 보고 잘라냄. 의사는 수술을 통해 찰리에 속하는 것은 모두 제거함. ->이후 셰릴은 남자아이 장난감과 옷 대신 여자아이 장난감과 옷을 갖게 됨. 의사는 셰릴이 인터섹스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성정체성의 약화를 일으킬 수 있기에 부모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함. 

-지식은 이해가 아니라 분류를 위해 만들어진다.(미셸 푸코)

-의학계는 이분법적이지 않는 인터섹스를 부정.

-셰릴에게 작동한 생산적인 권력은 언어와 의미를 활용했다. 셰릴의 성기에 결함이 있다고 해석하고 셰릴의 몸을 인터섹스로 생산하며 정상적인 남성과 여성을 기준으로 셰릴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력은 새로운 이름, 역사, 옷장, 침실, 장난감을 가진 새로운 인간을 지속적인 침묵과 삭제를 통해 사회적으로 생산해냈다.

-인터섹스 어린이는 사회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두려움이 섹스의 다양성을 상징한다. 

-우리는 '인터섹스'로 진단받은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클리토리스가 우연히 평균에서 2표준편차(0.96센티미터 정도의 임의적인 수치)보다 크다는 이유로 진단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우리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섹스는 양자택일의 문제로서 단순하게 구분된다. 0.95센티미터보다 작은 기관은 클리토리스로 분류되고, 2.5센티미터보다 큰 기관은 페니스로 분류된다. 전자는 여자아이, 후자는 남자아이가 된다. 

 

10.버틀러와 정체성 문제

-주류 페미니즘은 젠더표현과 젠더 정체성 문제와 마찰을 일으키거나 무시해옴. 제 4물결 페미니즘 젠더퀴어 청소년들은 주류 페미니즘을 떠남.

-페미니즘이 여러 젠더 경계를 무너뜨렸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무심결에 이분법적 젠더를 기초로 삼으면서 남서오가 여성, 남자와 여자, 남성성과 여성성 같은 구조를 새롭고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고착화했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마치 세계가 원래부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로 명확하게 나뉘는 곳이라는 듯 [이분법적인] 정치학을 전개함으로써 젠더 위반이라는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고 젠더 규범을 넘어서는 이들의 정치적 열망을 어둡게 만드는 데 실제로 일조했다. 

-페미니즘이 진보를 위해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주변화된 여성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경험을 마침내 경청하고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젠더 이분법을 따라 의미가 구획되는 상황에서 여성의 체현은 누구나 여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예컨대 공감, 보살핌, 협력, 감수성, 의사소통 능력으로 대표되는 특징적인 여성심리, 모성, 재생산에 치중됐다.

급진 본질주의는 트랜스 섹슈얼, 인터섹스, 남성과 동일시하는 다이크처럼 정체성 주변부에 잇는 이들을 진짜 여자에서 분리시키는 확실한 경계를 설정해 복잡한 현실을 없애고자 함. 급진적 본질주의는 '생물학은 운명이 아니다',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부정. 

-완벽하고 최종적인 여성의 정의를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 여성을 대변하는 일 외에도 역설적으로 [여성] 범주 자체를 질문하고 해체하는 일 역시 페미니즘의 의제여야 한다. 

-어떠한 젠더의 '존재'라는 것은 언제나 규범적인 이상에 끊임없이 가까워지려는 행위다.

-모든 남성이 남자로, 모든 여성이 여자로 보이는 일은 너무도 강력해서 자연의 섭리에 따른 필연처럼 느껴진다. 남자와 여자는 진짜 젠더처럼 보이지만 남성의 여성성, 여성의 남성성, 그 밖에 이분법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실패한 젠더, 어설픈 모방, 모조품처럼 여겨진다.

-여성과 드랙퀸의 관계는 진짜와 모방의 관계가 아니라 모방과 모방의 관계다. 젠더는 원본이 없는 모방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모든 젠더는 드랙이다. 모든 젠더는 퀴어하다.

-진짜 문제는 섹스와 젠더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점.

11. 모두를 위한 젠더 운동

-젠더권은 동성애자운동와 페미니즘이 끝내 외면한 가능성 이상인 것이어야 한다. 젠더권은 자신의 성별을 변경할 수 있는 권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젠더권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집단이 소유할 수 없으며,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배제할 수 없다. 젠더권은 인권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남자아이 또는 여자아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두 개의 비좁은 상자에 사람들을 욱여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상장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 

 

* 이 책은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저자가 말하는 젠더권에 대한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무척 요원하게 느껴진다. 페미니스트운동, 동성애자 권리운동도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나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남성이 아닌, 여전히 주변부인 여성과 주변부 중 주변부인 퀴어는 여전히 차별받는 존재이기에 함께 연대해서 차별에 맞서 싸우는 해법을 찾아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