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심화, 확장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 들뢰즈 철학에서 페미니즘 이론적 대안을 찾는 시도, 흥미롭지만 지나치다

Livcha 2023. 8. 31. 16:37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 책표지

들뢰즈 철학에 관심이 많은데 페미니즘과 들뢰즈 사상을 연결짓고자 하는 시도가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저자와 역자 소개


한나 스타크(Hannah Stark)는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니아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문학자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들뢰즈 철학과 윤리학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독특하다. 그의 논문 제목은 "들뢰즈의 차이 존재론과 윤리학의 문제". 영문학자로서 페미니즘과 퀴어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니 관심 분야가 무척 광범위하다. 

프랑스 대학교 철학과에서는 푸코는 다루어도 들뢰즈는 다루지 않는 데 반해, 오히려 들뢰즈 철학은 철학과 밖의 예술가, 건축가 등 철학과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영문학 전공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면서 들뢰즈 철학을 다룬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시도가 흥미롭게 여겨졌지만 사실상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보기 시작했는데, 막상 보다 보니까 손에서 책을 놓기 어려울 만큼 흥미롭다. 무엇보다 들뢰즈 철학, 페미니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쉽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작가 역량이 대단하다. 평소 화가로 활동하면서 들뢰즈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

1장 사유

-영미페미니즘의 세 시기 구분: 1) 제 1물결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을 주장. 계약 및 재산권, 투표권을 위해 투쟁. 자유주의적 휴머니즘과 관계맺음. 캐롤 페이트먼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1988)> 2) 제2물결은 결혼, 가족, 이성애 섹슈얼리티 제도에서 오는 여성억압에 집중.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신화(1963)> 이성애 백인 중산층 여성의 곤경을 다룸. 남성과 여성을 중화시키는 자유주의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 여성의 본질적 본성을 주장. 남녀 성의 차이에 주목. 또 유색인종 페미니스트,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노동계급 페미니스트의 구체적 정치문제 제기. 다양한 여성들의 연대. 3) 제3물결은 여성의 본질적 본성에 대한 믿음 거부. 기표로서의 여성 이해. 여성 범주 내의 실존적 차이 찬양. 섹슈얼리티와 신체의 중요성 부각. 성과 젠더 모두 이성애적 담론 내에서 구성됨을 검토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작업. 

-엘렌식수,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남녀 성적 차이 강조. 기존 텍스트 내의 여성 목소리 침묵. 여성의 글쓰기는 여성 신체의 구체성에서 나온다고 여김. 여성의 모성적 수용력과 성적 즐거움을 이야기. 여성 욕망의 특수성. 남성적 이성, 합리성에 도전. 

-이성을 남성적인 것으로 보는 페미니즘의 기획은 지금도 계속됨. 

-들뢰즈 철학은 이성에 대한 관습적 이해에 맞서면서도 사유의 새로운 개념 제공.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사유의 토대이자 철학의 기원으로서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거부한다. 완전히 구성된 주체가 아니라 과정에 있는 사유. 자유주의 휴머니즘적 개인을 넘어 주체를 다시 상상하기. 

-나무는 뻗어가는 뿌리와 나뭇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사유에 관한 질서정연하고 위계적이며 따라서 합리적인 체계를 제공한다. 대신 리좀은 중심 없이 모든 방향으로 뻗어가면서 질서 없고 체계적이지 않은 사유의 움직임을 인정한다. 리좀의 예 중 하나는 풀의 리좀이다. 그들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정리된 잔디밭을 구성하는 풀의 종류가 아니라 틈 사이에서 자라며 굴하지 않는 잡초다. "많은 사람의 머릿 속에서 나무가 자라지만 뇌 자체는 나무보다 풀에 훨씬 더 가깝다"(천개의 고원, 17)

-배움을 구성하고 세계와의 새로운 만남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와의 접촉, 새로운 것과의 접촉이다.

-사유는 습관적인 것에서 생기는 게 아니다. 

-들뢰즈 사유모델은 복잡하고 비일관적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학자에게 유용. 사유는 구체적 신체에서 일어나고 신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젠더화, 인종화 가능하고 각기 다른 능력과 욕망을 가지고 있고 세계에 대한 구체적 경험을 가짐. 

 

2장 되기

-되기는 이질적인 것들이 관계를 맺고 그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을 때 생성된 새로운 개념.

-소수성의 혁명성. 

-되기는 '남성'보다는 '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성이 소수적이기 때문.

-여성-되기는 가부장제와 멀어지는 운동. 아이-되기는 성인기에서 떨어져나옴. 동물-되기는 인간중심주의로부터 거리두기. 모든 되기들은 소수자-되기의 일부분. 위계질서를 분열시킴.

-본질주의에 도전한다는 것은 젠더에 관해 문제적, 제한적 관념에 맞설 뿐 아니라 '여성'을 본질적으로 정의되는 일련의 특징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역사적으로 구체적이고 변화되기 마련이 일련의 특성들과 관련된 하나의 기표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여성이란 기표는 다양성을 가짐. 

 

3장 욕망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무의식의 실체가 아니다고 봄.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에 덧씌운 것. 무의식은 오이디푸스 드라마가 펼쳐지는 극장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생산되어한다. 즉 공장이다. 

-욕망의 결핍은 불가능. 욕망은 대상을 향하는 것이 아님. 성적 욕망에 국한 되지도 않음. 쾌락과 충족에 관한 것이 아님.(푸코의 입장과 차이. 푸코는 쾌락과 권력 배치가 욕망보다 더 중요.)

-욕망의 사회적 역사적 요인을 설명하지 못하는 정신분석학 비판

-욕망은 이질적인 것들을 모으는 능동적인 힘. 정신분열적 흐름으로 사물들 해체.

-욕망은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흐름을 방해. 그래서 욕망은 생산적. 혁명적. 

-욕망의 연결능력. 욕망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욕망하는 기계는 주체 이전에 존재.

-욕망의 탈주선이 중요.

-분열분석의 첫번째 과제는 오이디푸스의 파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욕망생산을 억압.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의 거세의 중심역할 거부. 거세는 정신분석학이  결핍을 코드화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관념. 

-욕망은 삽입이나 남성적 오르가슴과 같은 특정한 방향이 없으며 섹스는 목적론적일 필요가 없다. 

 

4장 신체

-섹스와 젠더의 구분은 우리의 신체화된 삶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핵심. 섹스는 신체와 연결되고 젠더는 신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존재하는 방식과 관련된다. 페미니스트는 섹스보다 젠더에 촛점을 맞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 

-버틀러에 의하면, 육체적 반복을 통해 구성되는 것은 젠더만이 아니고 섹스도 그렇다. 문화화되지 않은 신체는 없다. 성형태론의 성적 다양성 존재 인정. 인터섹스,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스, 젠더퀴어는 남녀 이분법에 일치하지 않거나 약화시킨다. 버틀러에 의하면, 젠더도 섹스도 타고 나는 것도 불변도 아니다. 

-몸페미니즘-두 유형의 신체를 정치의 중심으로 만드는 페미니즘 이론. 그로츠 <몸 페미니즘을 향해>, 모이라 게이튼스, 제네비에브 로이드, 엘스페스 프로빈, 조에 소폴리스, 로잘린 디프로스. 

-게이튼스: 섹스와 젠더 구분 비판. 정신과 신체 이분법 반대. 

-들뢰즈는 젠더의 사회적 코드화보다는 체현된 삶의 더 풍부하고 더 복잡한 표현을 인정하는 더 관심. 

-들뢰즈와 가타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원초적 근친상간 개념을 채택하기보다 근친상간의 욕망이 그것의 억압을 통해 만들어지면 근친상간의 금지는 보편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안티 외디푸스, 161)

-사회 내 젠더화된 역할은 특정한 시회적 경제적 구조의 현현, 타고나거나 보편적인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없다. 더욱이 섹슈얼리티와 욕망은 근본적으로 잉여적이고 복합적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성, 젠더, 섹슈얼리티의 위치는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무한히 다양한 신체들이 단지 '남성'과 '여성'의 범주로 영토화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들뢰즈의 연구에서 섹스와 젠더의 구분은 차이의 발생적 유동성이나 섹슈얼리티의 복합성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로츠: 동성애는 성적 선택이 발생시키는 보편적 과잉. 성적 선택의 과잉은 예술적이고 창의적이며 즐겁게 만든다. 

-공통성이란 정체성이나 분류학적 구분보다 행위를 통해 존재.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을 유기체로 조직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기능적 측면에서 신체조직의 이해를 거부. 

-신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신체를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

 

5장 차이

-들뢰즈는 존재의 토대에 있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라이프니츠, 플라톤과 자신을 구분함. 차이에 대한 자신의 정식화에 도달. 

-들뢰즈는 차이의 정치학의 가능성 제시. 이런 정치학은 (...)미분화, 불균등성, 유동성, 되기의 세계를 다룬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수자 정치는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데 집중. 소수자 정치는 구조와 조직화를 와해시키고 소수자-되기 확산에 집중. 소수자의 정치적 중요성은 다수자 안에 포함되거나 다수자되기에 있지 않음. 끊임없이 다수자 뒤흔들기. 페미니즘이 소수자 정치가 되려면 여성이라는 정체성 집단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를 지지하는 공리를 와해시켜야. 

  

6장 정치

 

-들뢰즈는 주체를, 주체 수준의 위, 아래 양쪽에 존재하는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과정의 효과로 여김.

들뢰즈의 주체성 모델은 우리가 보통 정치적 시민을 상상하는 근거가 되는 틀이기도 한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상충.

-헤겔의 주체는 세상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면서, 타자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인정(recognition)을 획득.

"자기 의식은 그것이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 혹은 그 사실로 인해 즉자적으로 또 대자적으로 실존한다. 즉 자기 의식은 단지 인정받음으로써 존재한다"

-인정투쟁 사례: 정치적 경제적 삶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여성의 투쟁, 시민으로서 사랑과 지위를 합법화하기 위한 동성애자투쟁, 법적 서류에서 이분법적 성에 속하지 않을 권리, 제3의 성을 인정받기 위한 트랜스젠더, 인터섹스의 투쟁.

-동일성과, 동일성이 가능하게 해주는 인정은 이차적. 새로움으로서의 차이를 낳는 과정에서 파생된 사후효과.

-재인식은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차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한계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유하는 것을 방해한다.

-버틀러: 존재는 타자를 인정하는 시각에서 의해 확인됨. "진정한 주체성은 상호인정을 제공하는 공동체에서만 번성한다"

적법해진 정체성의 전략을 확장하는 전략.  이전에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인정하기 위해 항상 인식론적 틀을 확장해야. 헤겔적 구조는 사물이 기존의 정체성 그리고 규범과 관련하여 발생함을 규정. 

-페미니즘의 지배적 방식으로서 정체성과 인정을 거부하는 것은 여성이나 여성 문제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과 다르다.

-그로츠: 정체성보다 행위의 정치. 

-지각불가능성의 페미니즘음 무엇인가를 만드는 데 전념. 분자적 수준에서 욕망의 흐름을 검토하고 욕망의 현실적 재배치 탐구에 관심이 있는 들뢰즈. 

-지각불가능성의 정치는 어떤 새로운 탈주선이 가능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이것이 위를 더 창의적으로 되게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존재방식을 찾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들뢰즈의 작업은 부분적으로 포스트 휴머니즘적 사유의 길을 열었다. 계몽주의의 틀을 넘어가도록 함.인간을 고양시켜온 사고 체계가 여성도 억압함.

-가부장제, 자본주의, 인간중심주의가 여성과 자유를 연관지으며 착취해옴에 대해 질문.

-포스트휴머니즘 페미니즘은 비인간페미니즘. 여성을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우지 않고 인간 범주 벗어나기.인간 자아의 내면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밖으로 향할 것.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생명력의 힘에 주목. 비인간적 페미니즘의 거대하고 파괴적인 힘이 이끌 삶과 정치에 대한 상상.  

 

들뢰즈 철학에서 이끌어낸 비인간적 페미니즘이론이 휴머니즘과 정체성에 기초한 기존 페미니즘 이론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기존 권력체계로 흡수되거나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체계를 균열내고 파괴시키는 행위, 그 행위는 분명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모든 흐름이 질서잡히고 조직화되는 과정을 피해갈 수 없다면 끊임없이 그 질서와 조직화를 파괴하는 흐름을 타는 소수자-되기만이 거대권력체계와 싸우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

끊임없이 소수자-되기를 위한 행위를 이어가는 삶을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의 이름에 가두는 것이 오히려 협소할 듯 싶다. 굳이 들뢰즈 철학에서 페미니즘 이론을 이끌어내려고 애쓰는 것이 흥미롭지만 오히려 지나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페미니즘을 넘어 들뢰즈 철학으로 이동하는 것을 권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