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시집: 도시의 고양이들] 삶의 고통에도 자유를 갈망하는 나이든 시인의 마음이 담긴 시집

Livcha 2021. 12. 17. 09:47

아마도 이 제목 때문에 친구가 내게 이 책을 선물했던 것 같은데...

이 시집은 1990년 동광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니 참으로 오래전 시집이다.

 

시집에는 "눈 쌓인 거리, 아직은 겨울인가 보다. 그러나 오늘 뺨을 스치는 밤바람은 봄냄새를 싣고 있다. 우리 늘 잘 살자! 아무 이유없이 ***에게 책선물 하고 싶은 밤에"라는 친구의 글씨가 쓰여져 있다.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읽지 않았던 것 걸까? 전혀 시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지난 밤 문득 이 시집을 펼쳐놓고 잠깐 읽어보았다. 

친구는 왜 이 시집을 내게 선물했던 걸까? 

 

작가 박경리(1926-2008)의 이 시집은 60대에 나온 책이니, 어느 정도 세월을 살아낸 여인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겪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병까지 들어 죽음을 생각해 보는 나이의 여성의 마음. 

시로 추정해보면 아마도 박경리는 60대에 유방암으로 가슴을 절단하는 수술이 받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찾아보니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지만 폐암으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아무튼 이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져 다가온 시어는 '외로움, 슬픔, 시간, 자유'였던 것 같다.

 

 

 "나는 꿈으로 살려고 했고 

어머니는 생활에 발묻고 사셨다"('서문안 고개' 중)

 

"세상은 진작부터

외롭고 쓸쓸하였다"('판데목 갯벌' 중)

 

"버림받은 고양이

집 잃은 고양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고양이

저이들끼리 모여 

살얼음까지 살았을 터인데

 

목숨의 슬픔이여

정처 없음의 슬픔이여"('도시의 고양이들' 중)

 

"우리는 시시각각

이별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시시각각

자신과도 이별하며 살아간다"('매' 중)

 

"커피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

시간의 소리가 들려 왔다

세월을 마시듯이

커피를 삼킨다"('시간' 중)

 

"나는 살아 있고 싶은 것이다

거짓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거짓은 자유가 아니다"('도망' 중)

 

"결국

외로움으로 견딜 수밖에 없는 걸까

내가 선 한치의 땅"('낙원을 꿈꾸며'중)

 

 

이 시집에서 마음에 든 시는 '배추'.

생명을 돌보면서 외로움을 걷어내는 시인의 마음에 공감이 된다.

 

대추나무 밤나무 잣나무

잎새들 다투어 떨어지고 

하마 오늘 밤은 서리 내릴라

 

낙엽 쌓인 밭고랑 누비며

살며시 정답게 배추 보듬어

짚으로 묶어 준다

 

목말라 하면 물 뿌려 주고

푸른 벌레들 괴롭히며

돋보기 쓰고서 잡아 주고

떨어진 낙엽 털어 주고

폭폭 흙 파서 거름 묻어 주고

 

배추의 입김

살아 있는 것의 가냘프고 

때론 강한 입김 느끼며

기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여름 한철 나는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시 '신산에 젖은 너이들 자유' 역시도 시인이 항상 갈구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좋았다.

 

내 집 뜰은 

언제나 풍성하다

나무열매

풀들의 씨앗

온갖 벌레

지렁이는 지천으로 있다

 

새야

한철이나마

배부르게 먹고

겁 없이 놀다 가려무나

농약 없이 가꾼 땅

너이들 위해

얼마나 다행이냐

 

내 친구 과객들아

신산에 젖은 너이들 자유

나의 자유도 혈흔의 자국

뼈저리는 외로움이었다

허나 끝내 버리지 않으리라

구만리장천

날으는 너이들처럼

 

또 무엇보다 내 마음에 훅 들어온 시도 있었다. '쓰레기 속에서'

이 시를 읽으며 난 60대가 되어 내 삶이 이런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잠깐 다짐했다.

하지만 이미 난 '책더미 그리고 먼지, 먼지'라는 구절에서 잠깐 움찔할 수밖에 없다.

 

쓰레기 속에서

나도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다

챙기고 버리고

무던히 균형 잡아 왔지만

이젠 지쳤다

 

눈을 뜨면 장롱이 있고

TV가 있고 찻잔이 있고

쓰레기통에는 파지가 가득

주전자 재떨이 책더미

그리고 먼지, 먼지

 

떠나고 싶다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홀가분히

상큼한 풀밭길을 걸으며

물에 씻긴

시내 자갈 밟으며

 

한지도 도배한 

절방 같은 마음 되어

떠나고 싶다

 

탐욕 때문인가

그런 것 같다

게으름 때문인가

그런 것 같다

늙어서 그런가

아마 그럴 것이다 못 떠나는 것은

 

 

시인이 고인이 된 지도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삶의 슬픔, 외로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자유를 갈망하고 꿈을 이야기했던 시인도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결국에는 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그림자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노년의 시간, 그 마음을 담은 시인의 시가 마음에 전해져온다.